20030725084328-0514k_jangpilsoon3장필순 – 이 도시는 언제나 외로워 – 서울음반(SRCD 3168), 1992

 

 

그들도 우리처럼

손가락으로 꼽아볼 수 있을 만큼의 날들만이 남아있던 1992년의 끄트머리, 장필순은 그때만 해도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동숭동 대학로의 소극장 ‘학전’에서 크리스마스 공연을 시작했다. 그녀의 첫 단독 무대이기도 했던 이 크리스마스 공연은 그 후로도 몇 차례 새 앨범 발표와 겸해 열린 일종의 전통이 되었다. 10여 년의 시간은 기억을 시들게 하는 데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지만, 추위를 헤치고 온 관객들을 따뜻하게 해 주었던 그녀 특유의 입담, 곡에 따라 탬버린이나 짤짤이 소리를 내는 마라카스(maracas)를 흔들며 리듬의 흥을 돋구던 몸짓, 그리고 밴드를 소개할 때도 치렁치렁한 머리카락 너머로 얼굴을 좀체 드러내지 않던 베이시스트 조동익의 모습 같은 것들은 유독 생생하다. 아, 그리고 수잔 베가(Suzanne Vega)를 좋아한다고 고백하면서 커버했던 “Luca”도. 그래서 근 10년이 지난 뒤 수잔 베가의 무대에서 ‘장필순 뺨치는’ 푸근한 말솜씨와 재능 있는 베이시스트의 협연을 보았을 때는 일종의 기시(旣視, deja vu)현상이라도 체험하는 것 같았다.

그 1992년의 공연에서 한 곡도 안 빠지고 실연(實演)되었던 장필순의 세 번째 앨범은 가수 장필순과 편곡자/프로듀서 조동익의 오랜 파트너쉽이 굳어진 첫 작품이다. 비록 이전과 마찬가지로 작사, 작곡은 다른 여러 사람들의 이름을 포함하고 있지만, 이 모든 것들이 일관된 하나의 흐름으로 모이는 느낌을 주는 건 실질적인 음악감독을 담당한 조동익의 공으로 돌릴 수 있다. 당시 그가 추구하던 바가 팻 메씨니(Pat Metheny) 스타일의 퓨젼 재즈로부터 영감을 얻은 솜털같이 가볍고 부드러운 사운드였다면, 거기에 장필순보다 더 어울리는 목소리를 찾기도 아마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게 시작한 이들의 파트너쉽은 지구 반대편에서 주목을 끌었던 수잔 베가-미첼 프룸(Mitchell Froom)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음악적 경향을 보였을 뿐 아니라 아주 대조적인 결과를 낳았다.

봉고, 콩가, 마라카스 등의 아프리카/라틴 타악기가 살살 맛뵈기 식으로 선을 보이면서 어쿠스틱 기타와 더불어 보사 노바 리듬을 쌓아가는 “가난한 그대 가슴에”는 중력으로부터 벗어나고픈 ‘가벼움의 추구’를 가장 잘 보여주며, 앨범의 기본 색조를 설정해주는 첫 곡으로 나무랄 데 없는 선택이다. 맑게 울리는 건반의 터치나 겹겹이 싸여있는 보컬의 질감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베이스마저 쿵쿵 찍어 내리는 게 아니라 붕붕 떠올려 주는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비슷한 분위기를 이어가는 “옛날처럼”은 기타리스트 손진태의 곡으로 나와 있는데, 실제로 기타 사운드는 귀에 잘 안 들리고 박용준의 건반과 조동익의 베이스가 차라리 돋보인다.

이처럼 가볍고 상쾌함이 앨범의 ‘제 1 주제’를 이룬다면, ‘제 2 주제’로 등장하는 것은 나른한 고독감이다. 아침 잠깰 무렵보다는 땅거미가 질 때 들으면 정말로 좋을 듯한 전주로 시작하는 “도시의 하루”는 장필순의 노랫말로 발표된 첫 작품이기도 하다. 앨범 제목으로 쓰인 ‘이 도시는 언제나 외로워’나 ‘오늘은 또 어떻게 보내야 할지/ 그 생각에 하루가 지나가겠지’하는 대목은, 공동체 중심의 전통적인 삶이 도시화의 급진전에 따라 점점 고립적이고 개인중심적으로 재편되어 가는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이런 문제의식이 좀더 분명해지고 비판적인 성격을 띠게 되는 것은 “강남 어린이”에서다. 가사로 미루어볼 때, 노래를 한 장필순뿐 아니라 곡을 만든 정원영의 경우도 서울의 강남이 개발되기 전 그곳에서 자라났음이 틀림없다. ‘내가 꾸었던/ 어린 날의 꿈/ 바람 지나간 뒤에 낯선 모습만’이 어린아이의 천진한 시선을 통해 은유적으로 고발하고 있는 것은, 부동산 투기 ‘바람’을 타고 불도저가 오랜 삶의 터전들을 밀어붙이던 197-80년대 ‘개발’의 온갖 부작용들이다.

상쾌함과 우울함은 마치 도시의 낮과 밤처럼 떨어질 수 없는 양면으로 곡에 따라 번갈아 가며 나타나기도 하고, “내가 좇던 무지개”에서처럼 한 곡 안에서 같이 모습을 드러나기도 한다. 조동익의 곡이지만 이병우의 체취를 짙게 띠는 마이너->메이저->마이너의 어쿠스틱 기타 화성 진행, 그 굴곡 위에서 장필순의 목소리는 교묘하게 미끄럼을 타면서 어느 지점에서 오르막과 내리막이 바뀌었는지를 모호하게 만든다. 그리고 “어느새”의 영광을 다분히 의식해서 넣은 듯한 보사 노바 풍의 퓨젼 재즈 발라드 “슬픈 사랑”이나, 심지어 “제비꽃”의 애잔함조차도 마냥 무겁게 내리누르는 감정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Luca”와 “Tom’s Diner” 같은 곡들이 수록된 수잔 베가의 [Solitude Standing](1987)은 명반에 틀림없지만, 두 음반 중 하나만 선택하라고 한다면, 아마 나는 서슴지 않고 장필순을 고를 것이다. 음악적인 우열이고 뭐고 다 떠나서, ‘5월의 향기와/ 춤추는 거리와/ 어두운 그대 창가에 맑은 햇살 가득 비출 때'(“가난한 그대 가슴에”)를 들으면 1980년대 말-90년대 초의 어수선한 시기, 서울의 5월 봄 거리에 넘쳐나던 열정과 생동감을 가난한 내 가슴에도 되새겨볼 수 있기 때문이다. 20030722 | 김필호 antioedipe@hanmail.net

9/10

수록곡
1. 가난한 그대 가슴에
2. 옛날처럼
3. 도시의 하루
4. 넓고 좁은 세상 속에서
5. 내가 좇던 무지개
6. 강남 어린이
7. 슬픈 사랑
8. 홀로 서 있는 나
9. 제비꽃
10. 다시 아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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