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725084012-0514k_jangpilsoon5장필순 – 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 때 – 하나기획/킹 레코드, 1997

 

 

낯설고 차가운 서정, 혹은 더러운 이슬

나지막이 속삭이는 여성 보컬과 단촐한 피아노 반주, 맑게 울리는 어쿠스틱 기타의 아르페지오로 시작되는 이 곡은 나긋한(laid-back) 포크 발라드가 전개될 것임을 예감케 한다. 어딘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은 2절에서 3절로 넘어갈 때 ‘귀곡’을 닮은 서늘한 코러스가 울려 퍼지는 순간부터이다. 그 코러스가 걷어낸 나풀거리는 장막 뒤에 놓여 있는 곡은, 여전히 나긋하되 방금처럼은 아니다. 울림이 풍부한 것처럼 들렸던 악기들의 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닫혀 있고, 더불어 차갑다. 기복없는 멜로디를 따라가는 기복없는 보컬은 나직하다기보다는 무감(無感)하다. 가사는 추억을 다루나 추억을 노래하는 목소리에는 미련이 없다. 곡의 끝부분에 울리는 행진곡풍의 드럼은 모든 걸 다 털어버렸다는 뜻일까? 하지만 그러기에 연주는 너무 힘이 없다. 그래서, 곡이 다 끝나면 싸늘한 손이 머리 뒤편을 쓰다듬고 간 듯한 무기력함에 빠지게 된다. 우리는 방금 “첫사랑”을 들은 것이다.

장필순의 다섯 번째 음반에 대해 말하라면, 나는 이 음반에서 장필순의 음악 경력이 절정에 이르렀다고 대답하겠다. 최근의 여섯 번째 음반 또한 경이롭지만 그것은 그녀가 절정에서 내려오지 않았다는 의미에서의 경이로움이라 말해야 할 것이다. “어느새”를 선보였던 인상적인 데뷔 음반 이후 그녀는 포크를 기반으로 한 각종의 음악 스타일을 섭렵했으되, 그것이 또렷한 울림 속에서 일관성과 통일을 이룬 음반은 이 음반이다. 그 일관성과 통일은 차갑고 명료한 작곡과 편곡, 과장되지 않은 사운드 프로듀싱을 통해 이루어진다. 다만 이는 라디오에서 소폭의 히트를(그리고 그 점을 염두에 둔 것 같은) 기록한 “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 때”를 제외한 것이다. 음반의 전체적인 분위기에 비해 지나칠 만큼(혹은 ‘정상적으로’) 에코가 많이 걸린 이 곡은 음반이 갖고 있는 낯설고 차가운 서정성과는 묘한 부조화를 이룬다. 다른 말로 하자면 제일 먼저 귀에 들어오는 곡이기도 하다.

그래서 “첫사랑”과 더불어 음반의 특성이 가장 명확하게 나타난 곡으로는 “스파이더맨”과 “TV, 돼지, 벌레”를 꼽아야 할 것이다. 최근 음반에 실린 “Soony Rock”의 전초전격이라 할 만한 이 곡은 간소하게 두드리는 드럼, 딸깍거리는 키보드 연주, 심지어는 기타의 디스토션까지도 맑게 처리한 품위있는 모던 록이다. 윤영배의 작곡은 섬세하고 낭만적이며, 거미가 줄을 잣듯 매끄럽게 오르내리는 보틀넥 기타는 시각적인 효과를 노린 것 같다. “TV, 돼지, 벌레”는? 뜻밖에도 이 곡에서 소외 효과를 가져오는 것은 장필순의 목소리이다. 나이아가라 폭포라도 보는 것처럼 멍하게 노래하던 그녀는 이 곡에서만큼은 냉소적인 음색으로 “벌.레.처럼”이라 뇌까린다. 그래서 놀라움은 더 커진다. 살짝 걸린 보컬 변조는 그 효과를 더욱 높인다.

음반의 뒷부분은 초반의 분위기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면서 록의 색깔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장필순 표 포크인 “풍선”과 나른함과 경쾌함이 동시에 살아 있는 “빨간 자전거 타는 우체부”, 다소 ‘격렬한’ “넌 항상” 등은 초반의 단단한 음악적 구축에는 미처 가닿지 못했거나, 혹은 듣는 동안 음반의 분위기에 우리가 익숙해진 것이리라. 그렇다 해도 이 곡들이 ‘탁월한 시작에 비해 기대에 못 미친다’는 말을 들을 이유는 없을 것이다. 조동익의 섬세한 편곡은 놀라울 뿐이며, 다섯 곡의 작곡에 자신의 이름을 올린 장필순은 윤영배나 조동익에 비해 뒤떨어지지 않는 송라이팅 솜씨를 선보인다.

마무리를 짓자. 이 음반은 그 당시 하나기획의 음악적 능력이 어느 정도까지 이르렀는지를 보여주는 수작이다. 묘하게 떠 있는 사운드, 명민한 작곡, 섬세한 가사, 직선적이면서도 결이 많은 장필순의 목소리는 이 음반에서 흠결없이 이어졌다. 이는 땅에 머무른 소리이되 걸어가는데 땅바닥을 필요로 하는 것 같지 않은 소리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초월적이면서도 현세적이다. 굳이 금을 그어보자면 현세 쪽이 강하겠지만, 아마 이런 소리가 바라보는 우리의 모습은 “이미 정해진 길을 가는 / 조금도 벗어날 수 없는” 스파이더맨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음반은 거미줄에 맺힌 이슬일 것이다. 이슬이 생각만큼 깨끗하지 않다는 것을 떠올려보면 분명 그렇다. 20030525 | 최민우 eidos4@freechal.com

9/10

수록곡
1. 첫사랑
2. 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 때
3. 스파이더맨
4. TV, 돼지, 벌레
5. 풍선
6. 빨간 자전거 타는 우체부
7. 그래
8. 그녀에 관한 짧은 얘기
9. 넌 항상
10. 사랑해봐도
11. 이곳에 오면
12. 집으로 돌아오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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