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의 외인구단 신촌 블루스, 장타를 날리다

20030712014635-0513int_uminho21Q: 1986년, 드디어 신촌 블루스 활동이 시작됩니다. 1987년에는 LA에서 공연도 하고, 1988년엔 첫 음반 [그대 없는 거리/아쉬움](지구, 1988-01-10)이 나오구요.
– 맞습니다. 1986년 4월부터 시작했죠. 신촌의 ‘레드 제플린’에서. 6월에 파랑새 극장에서 공연한 건 ‘레드 제플린’ 사장 강선철 씨가 기획해준 것이고요. 1987년 LA 공연은 이문세가 같이 가자고 해서 간 겁니다. 왜냐면 원래 (작곡가)이영훈을 내가 이문세한테 소개해줬거든요. 이문세가 뜨기 전에, 이문세의 소속사 킹 레코드가 내가 있던 광화문 랩 스튜디오 바로 위층이었어요. 이문세가 맨날 내려 와서 곡 달라고 하길래, “내가 만든 곡은 너한테 맞는 곡이 없으니 그러지 말고 저 친구(이영훈)한테 가봐라. 너한테 어울리는 곡은 저쪽에 있다”고 했죠. 당시 이영훈이 우리 밴드 건반이었는데, “난 아직 모르잖아요” 같은 노래를 만들었었거든요.

Q: 신촌 블루스라는 이름은 ‘광화문 블루스’라는 공연을 보고 나서 짓게 되었다는 의견도 있는데요. 신촌 블루스 특유의 타이포그래피도 있었던 것 같구요.
– 우선 우리가 공연하는데 팀 이름이 필요했어요. 다들 블루스를 좋아했고, 또 신촌에서 만났기 때문에 짓게 된 거죠. 우울을 뜻하는 ‘블루’의 의미도 없지 않은데, 구성원이 여러 명이니까 복수형을 써야 하고 그러려면 어차피 ‘s’자가 들어가야 하니까… ‘신촌Blues’란 글꼴은 서희덕 씨가 어디서 갖고 온 건데, 자세한 건 모르겠네요.

Q: 예전 인터뷰에서 ‘신촌 블루스의 음악은 블루스가 아니라 가요다’라는 요지의 말씀을 하신 적이 있는데요.
– 물론 블루스를 바탕으로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얘기는 음악의 형태가 전부가 아니라는 겁니다. 저게 무슨 블루스냐 그러면 좀 짜증스러워요. ‘신촌 블루스에는 블루스가 없다’라고 어떤 평론가가 얘기했던데, 그럼 밥 딜런이 포크 싱어냐고 묻고 싶어요. 물론 밥 딜런은 포크 싱어죠. 하지만 실제로 밥 딜런의 음악을 들어보면 블루스가 더 많거든요. 그럼 밥 딜런이 블루스 맨이냐. 그러니까 어떤 형식, 눈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 얘기해선 안 된다는 거죠. 우리가 언제 블루스 한다고 했어요? 신촌 블루스라는 이름 자체는 블루스를 좋아했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고, 정통 블루스도 할 줄 압니다. 하지만 안 하는 거죠. 왜냐하면 듣는 사람들이 지루해 하거든요. 정통 블루스도 한두 곡이죠. 줄창 정통 블루스만 하면 어떻겠어요? 그리고 우리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을 했습니다.

Q: 신촌 블루스는 밴드라기보다는 이정선 님과 엄인호 님 두 분이 주축이 된 프로젝트인데. 나머지 포지션은 세션으로 생각하신 건가요?
– 그런 셈이죠. 신촌 블루스는 진짜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하려고 만든 팀이었어요. 사회적으로는 당시 규제 같은 것은 많이 풀렸지만 그래도 방송국은 하는 짓거리가 여전했거든요. 그래서 (이)정선 형을 찾아가서 ‘우리가 진짜 하고 싶은 음악을 해보자, 블루스도 좋고’ 하면서 제안했죠.

Q: 그렇지만 이정선 님이랑 트러블이 좀 있으셨다고 들었는데요?
– (이)정선 형은 교본 기타라 그럴까, 악보대로 쳤으면 좋겠다는 쪽이었던 반면, 나는 악보상으로는 그렇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연주를 안 한다는 쪽이었거든요. 왜냐면 악보대로 기타를 치면 음악이 너무 딱딱해지거든. 그래서 내가 좀 그런 데서 불만을 토로했고…

Q: 그래도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긴장이 있으니까 결과물이 좋았다고 생각하는데요.
– 어쨌든 틀을 만드는 사람은 (이)정선이 형이거든. 그건 당연하다고 보는 거거든. 근데 (이)정선이 형 생각이 너무 고지식하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약간 문제가 있었던 거죠. 뭐 큰 건 아니고. 사람들은 내가 (이)정선이 형하고 같이 했다가 헤어지고 그러니까 괜히 불화설 이렇게 보는데, 우리는 사이가 나빴던 적은 없어요.

Q: 정경화, 정서용 등, 이른바 ‘엄인호의 우먼들'(웃음)이랄 수 있는 분들은 어떻게 픽업하게 된 거지요?
– 정서용은 다운타운에 약간 알려져 있었나봐요. 사람들이 노래 잘 한다고 그러더라고. ‘츄바스코’에서 봤는데, 들어보니까 나하고 취향도 맞는 것 같더라고요. 부르던 노래는 약간 포크이면서도 블루지한 곡… 에밀루 해리스 그 쪽. 컨트리지만 컨트리적이지 않은. 신촌 블루스가 ‘레드 제플린’에서 공연하면서 여자 가수가 필요했기 때문에(물론 한영애가 있지만), 정서용한테 같이 하자고 했죠. 정경화는 우연히 알게 되었는데, 신촌 블루스가 춘천 공연을 갔다가 기차 타고 돌아오던 길이었어요. 청량리역에 내려서 근처 호프집에 들어가 뒷마무리를 하고 있는데, 정경화가 노래를 하고 있었지. 노래를 딱 들으니까 쟤도 장난이 아니더라고. 무슨 노래인지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아마 포크였던 것 같아요. 정서용하고 다르게 좀 파워가 있고. 그래서 정경화를 불러서 노래 참 잘 한다고 했지. 정경화가 당시 나를 알고 있더라고. 그 후에 잊어버렸는데 정서용이 “골목길” 녹음할 때 코러스가 필요해서 코러스 할 만한 여자를 데려와라 했는데 그게 정경화였어요. 그러니까 되게 반갑지. 엉뚱한 데에서 또 만나게 되니까.

Q: 그럼 ‘엄인호와 더 멘’ 중 하나인 김형철 님은 어떻게 픽업하신 건지.
– 김형철은 대구 공연 갔을 때 맨날 와서 일 도와주고 그러던 친구예요. 그러다가 하루는 김형철이 자기도 노래하고 싶다고 전화가 왔더라고. 그 때 우리 집이 제법 넓었거든. 그래서 우리 집에 와서 살면서, 내 일도 좀 도와주고 음악도 배우라고 그랬죠. 김형철은 (김)현식이의 영향을 많이 받았죠. 맨날 종크 먹었지만. 그래서 매일 서강대 뒷산 올라가서 노래한다고 악쓰고 오고. (김)현식이 죽기 전인가, 그때 좀 새로운 가수가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라이브 스테이지에 김형철을 계속 데리고 다녔습니다.

Q: 지구 레코드에서 나온 신촌 블루스 1집은 서희덕 님(현 뮤직 디자인 대표)이 제작한 거라 그러셨는데요. 안목이 있었던 셈인데, 동아기획 김영 사장과 비교하면 어떤가요.
– 안목이라면, 뭐 서희덕 씨가 DJ 출신이니까 음악은 좀 듣는 편이죠. 김창완 같은 스타일을 굉장히 좋아했고 영향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그렇지만 음악 듣는 안목에선 김영 씨가 낫다고 봅니다.

Q: 그럼 신촌 블루스 1집은 음악적 자율성 면에서 어땠나요? 서희덕 님이 서판석 님처럼 개입하진 않았나요?
– 신촌 블루스 1집은 우리가 전적으로 자율성을 가지고 만든 음반이에요. 참, 서희덕 씨가 노래 제목은 하나 바꿨네요. “그대 없는 거리”는 원래 제목이 “도시의 밤”이었거든요. 이 곡은 내가 개인적으로 애착이 많이 가는 곡인데, 내 생활이 그랬기 때문이죠. 진짜 눈물나는 얘기인데, 싸구려 셋방 살면서 정말 가슴 아플 때 만든 곡이었거든요. 솔직히 나이트 클럽에서 일한다는 게 괴롭고, 그렇다고 돈을 많이 벌어오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매일 술 마시고 그럴 때예요. 근데 우리 와이프가 고생해도 좋으니까 하고 싶은 거 하라고 그러더라고. 어느 날 술에 취해서 집에 들어갔는데, 이불 밖으로 우리 갓난쟁이의 발이 나왔는데 애 발가락을 보는 순간에 ‘야, 이거 이렇게 살아도 되나’하는 생각이 들면서 울컥 하더라고. 그래서 다시 나가서 신촌역 앞 포장마차에 가서 해뜰 때까지 술을 진탕 마셨지. 그때 막 가사가 떠올라서 쓴 거예요.

Q: 엄인호 님 음악은 블루스가 짙지만 소울의 요소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 점에서 신촌 블루스 1집에 박인수 님을 초대해 노래를 실은 건 고개가 끄떡여지는 것이었습니다. 박인수 님이 참여하게 된 정황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 신촌 블루스 1집 만들 무렵, 김홍탁 형이 홍익대 부근에 작업실을 만들었어요. 레코드 사업을 하고 싶어했거든요. 서울 재즈 아카데미 하기 전이죠. 사실 그때도 항상 우리나라에 음악 배울만한 곳이 없다고 그런 학교를 만들고 싶다고 그랬으니까, 그 전초전쯤 됐겠네요. 그때 김홍탁 형이 나한테 자기 좀 도와달라고 그랬고, 그 작업실에 박인수 형이 자주 나타났거든. 김홍탁 형이 박인수 형을 소개해 주더라고. “네 스타일이다”라면서. 내가 소울 세대니까 내가 어렸을 때 좋아했던 사람이었는데, 같이 생활해 보니까 흔한 얘기로 코드가 안 맞더라고. 근데 그 형이 당시에 굉장히 어려웠거든. 어쨌든 그래서 박인수 형이 신촌 블루스 1집에서 노래 한 곡 불렀지. 근데 그 형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해서…

Q: 신촌 블루스 1집을 엄인호 스타일과 이정선 스타일이 양분되는 음반이라고 보아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같은 밤”의 경우는 이정선 님 곡인데 굳이 엄인호 님이 부르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엄인호와 이정선 스타일이 양분된 음반이라… 그런 편이죠. (이)정선 형이 내 쪽에 맞추려고 상당히 애쓴 셈이죠. “오늘 같은 밤”은 내가 부르면 더 블루지한 맛을 살릴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내 스타일로 한번 불러보겠다고 얘기하고 혼자 상당히 블루지하게 했던 거죠.

Q: 윤명운 님도 ‘레드 재플린’에서 어울리셨던 분이죠?
– 그렇죠. 윤명운은, 나중에 들은 얘긴데, 자기가 옛날에 기타 좀 친다고 깝죽거리고 다닐 때 내가 기타 치는 걸 보고 쇼크를 많이 받았다고 그러더라고. 내가 장끼들 할 때 봤나 본데… 일반적으로 일렉트릭 기타 치는 사람들이 전기 기타로 솔로는 잘 하지만 통기타는 잘 못 쳤어요. 근데 엄인호란 사람이 뭐 희한한 스타일로 치거든. “골목길” 같은 걸 통기타로 막 치니까…

Q: 서희덕 님과 결별하고 신촌 블루스 2집 [황혼/골목길](동아기획/서라벌, 1989-01-20)부터 동아기획으로 옮기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김영 사장이 스카웃 한 건가요?
– 신촌 블루스 1집 때만 해도 우리가 다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서희덕 씨는 판 잘 나가는 거 뻔히 아는데, 방송국에 돈을 엄청 뿌렸는데 본전도 못 건졌다는 둥 매일 죽는소리나 하고 그러더라고. 동아기획은 김현식이 거기서 판을 냈으니까 동아기획 김영 사장을 소개해줬죠. 갔더니 김영 사장이 흔쾌히 OK 하더라고. 딴 사람 경우는 모르겠는데 내 경우는, 김영 사장이 돈 갖고 째째하게 굴지 않았어요. 김영 사장이랑 끝낼 때도 내가 빚이 꽤 있었는데, 그냥 없던 일로 하자고 하고 끝냈거든.

Q: 이후 1997년 솔로 3집 [10년 뒤의 孤獨](동아기획, 1997)까지, 몇 장을 제외하고는 쭉 동아기획에서 음반을 내셨습니다. 그 동안 동아기획과는 전속계약이었나요?
– 계약서 같은 건 안 쓰고 그냥 한 장당 얼마 이런 식으로 했어요. 또 하나는 내가 하도 사고를 많이 쳐서 김영 사장한테 빚을 많이 졌거든요. 의리상 그 빚은 다 갚고 나와야겠다는 생각을 한 거죠. 뭐냐면, 나는 공연을 동아기획에서 관리한 게 아니고 항상 독자적으로 했거든요. 그러니까 지방 공연 같은 거 깨지기도 하고, 돈 못 받아오는 경우도 있고… 그러니까 동아 사장한테 가서 돈 빌려와서 틀어막고. 그러다 솔로 3집 [10년의 고독(孤獨)]까지 동아기획에서 하고 헤어졌어요.

Q: 중간에, 엄인호·정경화·김목경·조준형이 만든 [Super Stage](1993) 음반은 현대음향에서 나왔는데요.
– 김미선 씨가 현대음반에 문예부장 같은 걸로 있던 때일 거예요. 김미선 씨가 뭔가 하나 물건을 만들어 달라고 그러더라고. 당시 내가 동아기획 소속이었기 때문에 신촌 블루스 이름으론 힘들고, 대신 라이브 앨범은 내줄 수 있다고 그랬죠. 그렇게 해서 나온 음반이에요.

Q: 1991년엔 뉴서울 레코드에서 신촌 블루스의 [가을여행](OST) 음반이 나왔는데, 뉴서울 레코드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된 건가요?
– 뉴서울 레코드는 당시 신흥 음반사였어요. 스튜디오는 잠실이었죠. 김현식하고 나를 스카우트하려고 굉장히 욕심을 많이 부렸죠. 영화음악은 원래 [비오는 날의 수채화]가 나한테 들어왔었는데 시나리오가 안 좋아서 안 했거든요. 곽재용(감독)이 그때 아마 자존심이 상했었나봐. 그 다음에 [가을여행]을 가져오더라고. 제작비는 얼마 못 주니까 [비오는 날의 수채화]처럼 판을 만들어서 돈을 좀 챙기라 그러면서. (정리자 주: 곽재용 감독은 1989년 [비오는 날의 수채화]로 데뷔했다. 2001년 [엽기적인 그녀], 2003년 [클래식]을 만들었다.) 근데 결국은 못 챙겼죠. 그 뉴서울 레코드 사장이 문제가 있어요. 김현식 죽고 난 다음에 내 허락도 없이 라이브 음반도 막 만들어 팔고.

Q: 얘기 나온 김에, [가을여행]에서 노래에 참여한 육순화 님은 어떤 분인가요?
– 장끼들 때 [영 일레븐], [젊음의 행진] 같은 프로그램에 자주 출연했거든요. 그때 방송국에서 알게 된 친구죠. 거기서 춤추던 아이였는데, 가수가 되고 싶어했고 노래도 잘 했어요. 나도 잘 따랐는데, 이상하게 나랑은 운대가 안 맞았어요. 내가 찾을 땐 얘가 연락이 안되고… 그러다 마침 [가을여행] 할 때 얘가 나타났어요. 그래서 하게 됐지. 목소리가 되게 청순하죠. 녹음하고는 들떠서 되게 좋아했는데, 음반이 망하는 바람에…

Q: 그럼 신촌 블루스 2집 얘기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음반을 계속 듣다가 생각이 든 건데, 남자 보컬들은 허스키하고 좀 거친 목소리인 반면 여자 보컬은 절창 스타일이더군요(허스키한 한영애 님은 예외지만). 또 하나는 특히 3집 같은 경우에 여자 보컬들의 색깔이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런 것을 의도하신 건가요? 또 보컬 트레이닝이나 연습 과정은 어떻게 되는지도 궁금합니다.
– 딱히 의도라기보다는, 내 곡을 가지고 부르는 거니까 아무래도 내 영향이 많이 녹아들어 가게 되는 거죠. 일단 녹음하기 전에 내가 카세트 테이프에 녹음해서 내 노래를 들려주니까 비슷하게 서로 갈 수밖에 없고 또 서로 같이 있으니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죠. 연습은 동아기획에서 공연장 같은 데 연습할 수 있게 자리를 마련해주어서 거기서 했어요. 음반 녹음할 때는 연습을 따로 안 했구요. 스튜디오에서 했죠. 맨날 악보 그려주고 그랬는데, 지금 다시 하라 그러면 못할 것 같아요. (김)현식이 악보도 내가 그려주고…

Q: 김창완 님의 곡 “황혼”을 쓰게 된 이유는 어떻게 되나요?
– 내가 산울림 음반 세션할 때 “황혼”하고 몇 곡을 점찍어 놨었죠. 나중에 내가 음반 만들 때 넣으려고 늘 염두에 두고 있었어요. 그래서 실제로 음반에 넣을 때, 김창완한테 가서 내가 써도 되겠냐고 물어봐서 OK 사인 받고…

Q: 김종진 님이 부른 곡 “또 하나의 내가 있다면”은 좀 이질적인데, 넣게 된 이유는요?
– 김영 사장이 봄여름가을겨울을 좀 키우고 싶어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김종진의 곡이 들어간 거고. 김목경, 한상원이 참여한 것도 비슷한 이유예요. 김영 사장이 부탁을 해서 음반이나 공연에 참여시킨 겁니다.

Q: “환상”은 비공식 솔로 1집(1985)에서는 약간 촌스러운 전자 음향이 나오는데, 2집에선 트럼펫이 나오더라고요.
– 왜냐하면 내가 전자 음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솔로 음반 때는 그 당시에 그런 조류가 처음 시작되어서 심취했을 때라 전자 음악을 섞어서 해본 건데, 어느 순간 전자 음악이 내 음악이 아니란 판단이 들더라고. 나는 어떤 프로그레시브한 음악하고는 어떤 취향이 좀 안 맞는 거 같아요.

Q: “루씰”은 작사 먼저 해 놓으신 건가요? 아님 작곡을 먼저?
– 곡을 먼저 썼죠. 한영애가 곡을 달라고 왔더라고. 그 당시 내가 갖고 싶었던 기타가 ‘루씰’이었거든. 한영애한테 내가 곡을 주면서, ‘비비 킹 스타일의 곡이다’고 했고, 자연적으로 둘이서 제목을 ‘루씰’이라고 했죠. 한영애가 자기가 작사를 해 가지고 오겠다고 해서… 그렇게 만들어진 곡이에요.

Q: 김현식 님은 신촌 블루스와 함께 활동하기도 하고, 봄여름가을겨울이랑 같이 하기도 했는데요.
– 어쨌든 프로젝트 팀이니까요. 김현식이 신촌 블루스를 하면서도 독자적인 자기 팀을 만든 거죠. 거기서 유재하가 피아노 치고, 우리 것 할 때도 유재하가 도와주고.

Q: 1989년과 1991년 각각 신촌 블루스 라이브 음반이 나왔습니다. 라이브 음반은 내기도 힘들고 녹음하기도 힘든 현실이었는데요.
– 다른 애들은 스튜디오 가서 다 고치고 그러는데, 우리는 한번도 라이브 녹음을 고친 적이 없어요. 실수 한 것 자체가 라이브이기 때문에. 그래서 거기 표지에 보면 ‘또 틀렸네’ 뭐 이렇게 나오잖아요. 라이브 1집은 김영 사장이 내자고 해서 동아기획에서 한 거고, 라이브 2집 역시 동아기획에서 나왔지만 내가 녹음해서 갖다 준 거죠. 1집은 롯데백화점 잠실점에서 녹음한 것 같고, 2집은 마포 가든 호텔에서 녹음한 것 같네요.

Q: 김동환 님이 라이브 2집에서 노래한 건 김현식 님의 공백을 메꾸려는 의도였나요?
– (김)동환이는 예전 부산에서 만났다가 헤어지고 난 후 소식을 몰랐는데, 어느 날 보니까 (김)현식이하고 우리 공연장에 나타났더라고. 반가웠지. 그래도 뭐 절친한 사이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김)현식이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지니까, (김)동환이를 대신 내세우게 되었어요. 절친하진 않았지만 노래를 잘한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김)현식이도 자기가 너무 힘드니까 (김)동환이가 대신 같이 해줬으면 했고. 그래서 인제 본격적으로 (김)동환이와 같이 하기 시작한 거죠.

Q: 신촌 블루스가 웬만큼 뜬 이후에는 매니지먼트 관계가 어떻게 됐어요? 또 지금은 어떤지요. 열린 커뮤니케이션이라고 되어 있던데…
– 그때 방송은 김영 사장이 했으니까 난 신경 안 썼고, 공연 같은 건 친구들이 매니지먼트 해줬어요. 지금은… 열린 커뮤니케이션에서 내 공연을 만들고 싶다고 제안이 와서, 그러면 공연만 하지 말고 음반도 하라고 했죠. 난 회사 들어가서 돈 얘기하는 것도 싫으니까, 음반 제작 해주고 돈은 뭐 알아서 배분하고…

혼자 걷는 신촌길

 20030712014405-0513int_uminho22Q: 신촌 블루스가 잘 될 때는 멤버 모으기가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직접 찾아오는 사람도 있었다고 들었고… 그럼 거꾸로 말하면 다시 어려워지시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인가요?
– 한때는 돈이 좀 돌았죠. 공연이 망해도 걱정하지 않았으니까. 동아기획 사장한테 가서 ‘돈 내놔’ 하면 되었으니까(웃음). 그런데 3집 이후부터 그러니까 김현식이 죽고 나서부터는 흥행도 잘 안 되고 한영애까지 나가 버리고… 그때부터 진짜 점점 힘들어 지더군요.

Q: 3집 [비 오는 어느 저녁/향수](동아기획, 1990)부터 이정선 씨가 참여하지 않으면서 모든 과정을 관할하게 된 것도 이유의 하나일까요?
– 아까도 얘기했지만, (이)정선 형이 속으로 그랬겠죠. ‘어 이 자식 많이 컸네’하면서… 음악적인 이야기를 하더라도 내가 톡톡 말대꾸를 했으니까. 그리고 밴드 멤버를 내가 다 모아오다 보니깐 멤버들도 (이)정선 형 이야기를 잘 안 듣고 내 이야기를 듣는 편이었죠. 그러니까 (이)정선 형이 약간 삐진 것도 있었겠죠(웃음).

Q: 3집에 손석우 님이 작곡한 “이별의 종착역”을 넣게 된 이유는?
– “이별의 종착역”은 예전에 김영배하고 통기타로 연주할 때 그 곡을 연주한 적이 있는 곡인데, 어느 날 김현식이 “자기가 부를 만한 곡도 없고 어쩌구 저쩌구” 하더라구요. 그때 김현식이를 생각하니까 “저 녀석 죽을 날도 얼마 안 남은 것 같네”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너한테 어울리는 곡은 ‘이별의 종착역’이다”(좌중 웃음)라고 그랬죠. 가끔 연대 뒷산 같은 데서 같이 부른 적도 있어요. “야, 내가 옛날에 이별의 종착역을 이런 식으로 편곡한 게 있는데 한번 불러 볼께”했죠. 그랬더니 “어, 분위기 있다”고 그러더군요. 그런데 막상 노래하라고 그러니까 한번은 술에 떡이 되어 가지고 오더니 “나를 어떻게 보고 그러느냐. 나보고 죽으라는 얘긴데…”라고 말한 적도 있어요.

Q: 이은미 님과 김미옥 님은 스스로 찾아와서 참여하게 된 건가요?
– 이은미가 우리 팀에서 하고 싶었던 모양이에요. 이중산이 자기가 이은미라고 아는데 노래 잘한다면서 다리를 놓더라고. 김미옥도 나를 찾아왔죠. 부산의 아는 선배 카페에서 김미옥이 노래하고 있었는데 나한테 연락처를 알려 달라고 해서 내가 적어주고 왔거든. 그후에 김미옥이 노래하고 싶다고 찾아왔더라고.

Q: 김영배 님이 기타 세션을 해주었는데요. 오랫만에 연주하신 것 아닌가요?
– (김)영배가 그 전에 음악을 안한 건 아니고, 윤복희 씨하고 공연 다니고 그랬던 것 같아요. 대중음악이라기보다는 종교 쪽이었는데… 암튼, 내가 우리 공연할 때 뭐 세션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했죠. 옛날 생각도 나고, (김)영배가 고생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해서… 뭐. 그래서 공연도 같이 다니고 그랬어요. 그런데 자기하고 스타일이 좀 안 맞는지 지속되진 않았죠.

Q: 아무튼 3집 이후의 경우 사운드도 변화하는 것 같습니다. 한 인터뷰를 보니 “향수”라는 곡을 변화된 사운드의 대표곡으로 꼽으셨던데..
– 그 전까지는 기타를 칠 때 (이)정선 형이랑 호흡을 같이 맞췄어요. 그러다가 3집부터는 나 혼자 치니깐 이것저것 걸리적거릴 것도 없고 편곡 자체를 내가 다 했어요. “향수”라는 곡이 포크이면서도 블루지한 진행을 가지고 있고, 리듬 패턴도 달라졌죠. 한국 사람들은 블루스를 전부 느린 걸로 알고 있는데, 비비 킹의 “Thrill Is Gone” 같은 곡은 리듬이 아주 좋잖아요. 그때부터 내가 그런 영향을 많이 받은 거죠. 뭐랄까 포크이면서도 블루스와 합쳐서 독특한 기타 사운드를 만들고 기타 애드립 같은 것도 상당히 강렬하게 들어가기 시작했죠.

Q: 하모니카가 들어간 것도 또 하나의 특징으로 보입니다.
– 하모니카는 이낙진이라는 신촌의 후배가 불었는데 공연할 때 되면 자기가 하모니카 들고 와서 불고 갔어요. 그러고는 꼭 세션비 받아갔죠(웃음). 누가 올라오라고 그러지도 않았는데 한두 곡 불고 갔어요.

Q: 1집은 한영애 님, 2집은 정서용 님, 3집은 정경화 님, 이렇게 각각 부각된 음반 같습니다. 의도적이란 느낌이 드는데요.
– 그렇죠. 왜냐하면 제대로 된 여자 가수가 있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공연할 때 내 노래만 들으면 지겹거든.(좌중 웃음) 나 자신이 그런 걸 알고 있으니까. 내가 만들었지만 내가 못 부르는 노래가 많으니까 여자 가수들을 시킨 거죠.

Q: 그런 점이 좋았던 것 같아요. 보통 밴드 음악이면 좋긴 좋아도 보컬 한 명이 다 부르면 지루한 면이 있잖아요. 신촌 블루스 같은 경우에 약간 옴니버스 같은 느낌도 있고.
– 그러니까 (김)종진이네 밴드가 잠깐 들어오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죠. 그렇게 산만하지도 않고.

Q: 암튼 이때부터 기존 곡을 다시 부르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특히 “환상”, “도시의 밤”, “바람인가”, “골목길” 등은 여러 버전이 있구요. 이 가운데 제일 만족스러운 버전이 있다면 어떤 것들인지요?
– “환상”은 김현식을 위해서 그렇게 편곡한 것이고, 이번 공연 때는 김동환이 모던 록 스타일로 불렀어요. “그대 없는 거리”는 1990년에 나온 내 솔로 앨범이 가장 마음에 들고, “바람인가”는 원래는 포크 스타일의 블루스인데 그 곡은 분위기가 제일 안 나온 곡이에요. 제일 애착이 가는 곡인데… (이)정선 형도 그 곡을 듣고서 깜짝 놀랐을 정도니까. 그 당시에 그런 곡을 썼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골목길” 경우도 (김)현식이가 부른 게 인기는 있었지만 그것도 만족스러운 건 아니네요. 그것도 통기타로 하는 게 좋은데…

Q: 한 인터뷰에서는 1990년의 솔로 앨범 [Sing The Blues](동아기획/서라벌)가 가장 마음에 든다고 하던데 정확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 그 음반은 이 사람 저 사람 생각하지 않고 아무 구애받지 않고 낸 음반이었어요. 동아기획 사장도 음악적으로 뭐라고 그러지 않았으니까. 그 음반에 녹음한 곡들이 마음에 들어요. “그대 없는 거리”나 “달빛 아래 춤을” 같은 곡들. “그대 없는 거리”는 오래 전에 만든 곡이지만 “달빛 아래 춤을”은 음반 녹음할 무렵 만든 곡인데, “달빛 아래 춤을” 같은 곡은 내가 생각해도 너무 잘 만든 거 같아요. 이런 곡들은 일본이나 미국에서 연주하면 제일 먼저 반응이 오더군요. “첫사랑”은 (박)동률이 곡인데 참 괜찮은 곡인데, 내가 소화를 잘 못 시키는 것 같고…

Q: 이 음반에서 최구희 님이 기타 세션을 해 준 것으로 되 있는데 역할 분담은 어떻게 했나요? 그리고 이 음반부터 이펙트의 사용이 증가하는 느낌도 받게 됩니다.
– 내가 최구희의 기타를 굉장히 좋아해요. 뭐랄까 서던 록 냄새가 물씬 나는 기타예요. 나하고 참 잘 맞는 스타일이죠. 이 음반에서는 솔로는 아니고 리듬 쪽을 주로 담당했죠. 이펙트 쓴 이유는 정선이 형이 빠지고 나서 혼자 기타를 치려니까 너무 힘들더군요. 코러스도 쓰고 오버 드라이브도 쓰고, 와와도 쓰고… 이번 공연에서도 기타를 혼자 치니까 너무 힘들어서 이펙트를 조금 썼죠. 그런데 지난번에 새로 나온 앨범은 이펙트를 하나도 쓰지 않고 앰프만 가지고 다 했어요. 녹음실에서 “리버브 좀 씁시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이 썼고… 나는 지금도 완전히 ‘생 기타’로 치고 싶어요.

Q: 이 음반은 뉴서울 레코드의 스튜디오를 사용한 것으로 적혀 있습니다. 이 곳을 고른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그리고 녹음 과정에 특별한 차이가 있었는지도…
– 거기가 쌌기 때문이죠(웃음). 녹음과정은 그 무렵부터 일반적인 경우 합주를 안 하고 따로따로 하는 일이 생겼는데 나 자신은 그런 건 용납을 못 했어요. 지금도 그렇고. 일단 들어가서 같이 합주를 하죠. 나중에 추가로 몇 개 더 연주하면 몰라도.

Q: 몇몇 곡은 사연이 궁금합니다. “빨간 스웨타의 여자”나 “Blues For R.B.” 같은 곡 말입니다.
– 글쎄… “빨간 스웨타의 여자”를 작곡한 강문수 이번에 우리 공연에서 음향 맡았던 친구예요. 사군자 출신이죠. 강문수 부인이 이정란(듀엣 고은희·이정란의 이정란)인데, 강문수가 그 여자 때문에 만든 곡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Blues For R.B.”는 내가 그때 로이 부캐넌을 무지하게 좋아했기 때문에 만든 곡이고…

Q: 그러면 신촌 블루스의 4집에 대한 질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보컬에 새로운 분들이 많이 기용되었는데 일단 확인하겠습니다. “내 마음 속에 내리는 비는”, “서로 다른 이유 때문에”, “기적 소리”는 김형철로 들리는데 “밤마다 Blues”는 다른 사람 같습니다.
– “밤마다 블루스”는 정희남이에요. 정희남은 나이가 좀 들었고 목소리도 허스키해서 블루지한 분위기의 노래를 맡겼죠. 김형철에게 블루스를 맡기기엔 굉장히 힘이 들겠다고 생각한 것도 있고… (김)형철이 경우는 ‘김현식 같다’는 말이 많은데 그건 내가 시킨 게 아니라 자기가 그렇게 부른 거예요. 나는 사실 김현식 스타일로 따라가는 걸 조금 못마땅하게 생각했어요. 그 때만 해도 김현식이가 있었으니까. 그래서 나한테 야단을 많이 맞았죠.

Q: 신촌 블루스 4집 [내 맘 속에 내리는 비는/비오는 날의 해후](동아기획, 1992) 수록곡 가운데 “비오는 날의 해후”는 스타일이 좀 특이해 보입니다. 작사를 맡은 이원숙 씨라는 이름도 낯설고.
– 그 곡에도 사연이 있죠. 이원숙은 지구레코드의 문예부에 있던 사람인데 그때 송골매 출신인 이응수가 지구 레코드 문예부에 있었어요. 하루는 이응수한테 전화가 와서 “어떤 여자 가수가 있는데 엄인호 스타일의 곡을 받아 봤으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 여자가수한테 어울릴 만한 가사를 써 가지고 와라”고 그랬더니 이원숙이라는 사람이 가사를 써서 보낸 거예요 그래서 가사가 괜찮아서 “너희들이 원하는 스타일이 어떤 것이냐”고 물었더니 “약간 뽕스럽기도 하면서….언뜻 이야기 한 게 신중현의 ‘봄비’같은 스타일이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나도 예전에 “봄비”를 좋아했으니까 “봄비” 같은 스타일을 차용해서 쓴 것이에요. 표절이라는 게 아니라 그 스타일로 한번 곡을 쓴 것이죠.

Q: 공식 솔로 1집 [Sing The Blues](1990)에 참여한 작사가 김미선 님은 어떻게 알게 된 건지요?
– 김미선 씨는 원래 서울음반 가요파트에 있었어요. 근데 김미선하고 이광조하고 둘이 친구였는데, 나를 좀 만나고 싶다고 해서 봤죠. 당시 나는 방위 받으면서, 가발 쓰고 이광조랑 ‘로즈 가든’에서 노래할 때였어요. 이광조하고는 풍선에서 헤어졌지만, 밤일은 같이 했죠. 그게 1979년 여름 같네. 나는 그때 그 여자가 유명한 여자인 줄 몰랐죠. 나중에 얘기 듣다 보니 유명한 작사가더라고. 서울음반에 스카우트되어 들어가면서 나를 작곡가로 불러들인 거죠. 이건 다른 얘긴데, 원철희란 친구가 당시 서울음반에서 이문세 음반을 제작을 하고 있었는데, 나한테 몇 곡을 받아가서 녹음했거든. 이 음반은 발매되지 않고 접어버린 건데 나중에 이문세가 뜨니까 원철희가 그 음반을 내버렸지. 그것 때문에 싸움도 벌어지고…

Q: 약간 헷갈리는데요. 서울음반에도 들어간 적이 있으셨단 말씀이신가요?
– 그러니까 정식 직원은 아니고 작곡가로 의뢰를 받은 거지. 프리한 거죠. 그때 서울음반에 4월과 5월의 백순진 씨도 있었어요.

Q: 그럼 [Sing The Blues]에 나오는 윤미선 님은 김미선 님이 잘못 나온 건가요? 같이 쓴 가사도 있던데…
– 아뇨, 다른 사람이에요. 내가 방위 끝나고 팀에 들어가서 이제 밤일할 때인데, 설악산 나이트 클럽에 일하러 갔다가 불행히도 또 이노꾸리로 잡힌 거예요. 그렇게 잡혀서 6개월을 돈도 못 받고 일을 해주고(선불 받은 게 있으니까), 서울 올라왔는데 (이)정선이 형한테 연락이 왔더라고. “야 네 곡 좀 썼다” “무슨 곡?” 그랬더니 “골목길”이라는 걸 썼대요. 그래서 가수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윤미선이라는 모델하던 애래요. 누가 제작한 거냐고 물었더니 ‘서뽕’이 한 거라고. 내가 노래 연습도 시켜주고 그랬어요. “너의 맘속에 잊혀진 나는”은 윤미선하고 나하고 같이 가사를 썼는데, 어느날 윤미선이 자기가 메모한 거를 가져오더라고. 그래서 보니까 가사가 괜찮아서 내가 완전히 살을 다 붙였죠.

Q: 박보 님과 함께 낸 [Rainbow Bridge](2000)는 어떻게 나오게 된 건지..
– 그 음반은 처음에 서희덕 씨가 한다고 그랬던 거예요. 근데, 박보가 일본 말로 노래했으니까 문화관광부에서 ‘한국 방문의 해’ 씨디를 내는데 그걸로 한다던가 그래서 좋은 곡 몇 곡 가져가고 자꾸 시간만 끄는 거예요. 내가 못 견디겠더라구. 광화문 스튜디오에서 녹음했는데, 돈만 왕창 깨졌지. 그래서 다시 어떤 회사를 찾아갔는데, 벤처회사였어요. 자기네가 판을 제작한다고 살살 꼬시더라고. 그래서 결국 판이 거기서 나왔는데 내자마자 닷컴 거품이 빠지기 시작하더라고. 그러니 나만 코피 터진 거지.

여전히 ‘블루’한 근황들

20030712014405-0513int_uminho23Q: 예, 이제 최근 활동 몇 가지 물어보고 마무리하겠습니다. 사랑과 평화 출신의 최이철 님의 프로젝트인 [유라시아의 아침]에도 김동환 님 등과 함께 참여했던데요.
– 그건 하나의 프로젝트죠. 황원 스님이 있는데 그 친구가 나한테 곡을 썼으면 좋겠다고 말하더군요. 세계적으로 나갈 수 있는 스타일의 음악을 한다고 하면서… 그래서 최이철과 함께 하게 되었는데 최이철의 스타일은 퓨전이나 재즈 스타일이라서 나하고는 잘 맞지 않더군요. 그래서 나는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황원 스님이 굳이 해야 된다고 그래서 ‘내 음악 듣고 돌아버려라’는 마음으로(좌중 웃음) 애시드 같은 분위기로 노래불렀어요. 그 곡은 그런 분위기 같지 않나요? (김)동환이는 최이철이 따로 부른 것 같고…

Q: 최이철 님과는 음악적으로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김현식 님 같은 경우는 최이철 님의 먼 친척이고 함께 음악도 했던 것 같은데…
– 최이철의 기타 연주는 참 좋아하지만 둘 다 너무 강해서 무대에서 서로 합쳐지기가 힘든 것 같아요. 최이철의 음악은 예전부터 들었지만 친하게 지낼 만한 기회는 없었어요. 그게 아마 내 위치가 모호해서 그럴 거에요. 포크도 아니고 록도 아니고… 그러다가 나중에 (김)현식이 때문에 (최)이철이 하고도 친해지게 되었어요. 하루는 (김)현식이가 “아니 왜 형들은 만나면 인사도 제대로 안 하고 따로따로 앉아 있어요?” 그러면서, “내가 보기에 둘 다 성격도 비슷하고 술 좋아하고 하니까 술 한 잔 하자”고 그러더군요. 그때부터 서로 마음을 열기 시작한 거지. 그때 (최)이철이도 나를 괜찮은 사람으로 생각했고 곡도 참 잘 쓴다고 생각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나는 (이철이가) 굉장히 무서운 기타잽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쟤 앞에서는 음악 이야기하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했었죠.(좌중 웃음) 그런데 작년 말에 최희준 씨 공연에 최이철의 밴드가 세션을 맡고 나는 게스트로 가면서 음악적으로 더 깊게 이해하게 되었고, 최이철의 밴드에서 베이스를 치는 허경이 신촌에 ‘스윙’이라는 카페를 만들었을 때 내가 공연 리허설을 겸해서 연주한 적이 있죠. 그 친구가 참 사람이 좋으니까.

Q: ‘포크도 아니고, 록도 아니고’라는 말이 인상적입니다. 뭐랄까 1970년대까지 한국에서 록은 주로 ‘미 8군 무대’의 계보였던 것 같고, 반면 포크는 ‘캠퍼스권’의 계보였던 것 같습니다. 엄인호 님 경우 둘 사이의 접점 같은 위치에 있었다고 보는 건가요?
– 그렇죠. 흔히 그 당시에 사람들이 나를 보고 그렇게 이야기를 했어요. 미 8군 무대 출신들은 나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고. 포크 하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저 놈은 포크 하는 놈도 아니고 뭐하는 거야’ 하는… 그러니까 그때는 이쪽도 저쪽도 끼워주지 않았죠. 그런데 나는 포크 하는 사람들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미 8군 출신들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단점이란 건 다 있는 것이죠.

Q: 마지막으로 막연한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한국에서 음악이 잘 되려면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요?
– 일단 대중들이 많이 깨어야죠.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경제가 발전이 되면 문화도 같이 발전해야 하는데 한국은 그게 아니에요. 잘 알겠지만 죽어라 책 안 읽고, 음반 안 사고… 학교에서 쓸데없는 공부들이나 하고 있고.. 소비는 엄청나게 증가하면서도 문화나 예술 쪽에는 관심이 없어요. 내가 볼 때는 한국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있는 것 같아요. 정치인들도 문제가 있고..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아요. 이런 나라에서 우리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게… 나는 우리나라에서 예술 하는 사람들이 대견하다고 생각해요.

Q: 지난 번 공연 때 경제적으로 힘들다는 말을 ‘농담처럼’ 하셨는데 정말 많이 힘드신가요?
– 그럼요, 벌어놓은 돈을 음반 만드느라고 엄청 쏟아 부었는데 돌아오는 건 하나도 없고. 빚을 많이 졌어요. 지금 현실이 힘드니까 마누라한테 미안하죠. 일단 나 자신이 정신적으로 힘드니까. 금전적인 게 정신까지 힘들게 만드는 거죠. (이)정선이 형은 다행히 학교에 자리를 잡았지만 나는 그런 것하고는 또 맞지 않죠. 항상 돌아다니는 스타일이니까.

Q: 마지막으로 음악 하는 후배들 중 좋아하는 분은 누구인가요? 예를 들어 키워 주고 싶다거나…
– 특별하게 내가 누구를 좋아하는 건 아니고 신대철 같은 경우는 참 바람직한 방향으로 잘 하고 있는데 (신)대철이도 나처럼 되게 힘들어 하더군요. 그런 친구들이 아까워요. 저런 애들이 고생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Q: 음악을 꿋꿋이 하는 분들과 이야기하면 마지막에는 결국 우울해지더군요. 모쪼록 건강하시고 계속 정력적으로 활동하시기 바라겠습니다. 20030711 | 이용우 garuda_in_thom@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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