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선 – 너무나 속상해/불새야 동산으로 – 대한음반, 1979 이정선과 엄인호 만나고 헤어지다 풍선은 1978년부터 약 1년간 활동했던 듀오 혹은 트리오다. ‘듀오 혹은 트리오’라고 말한 이유는 이정선의 모호한 존재 때문이다. 본래는 이광조와 엄인호의 듀오로 계획되었던 프로젝트가 ‘제작자의 요구’로 인해 이정선이 정식 멤버처럼 가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드물지 않은 일이지만 음반 표지가 두 종류가 있는데, 한 종에는 ‘풍선’이라는 이름만 나오고, 또 하나의 종에는 ‘풍선 & 이정선’으로 나오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광조와 엄인호가 서로 마주 보면서 웃고 있는 반면 이정선은 뒤쪽에서 무표정하게 신문을 읽고 있는 표지 사진의 구도도 이런 사정을 반영해 준다. 이정선과 이광조의 경력을 고려한다면 혼성 4인조 해바라기가 이런저런 사정으로 해체된 다음의 프로젝트이고, 엄인호의 경력을 고려한다면 전업 음악인으로 데뷔하는 의미를 가진 음반이다. 이정선은 이미 몇 장의 앨범을 통해 솔로 음악인으로 자리를 굳힌 상황이었고, 이광조 역시 해바라기 2집과 솔로 데뷔 앨범을 발표한 상태이므로 일차적으로 주목의 대상이 되는 인물은 엄인호다. 일단, 수록곡 가운데 엄인호가 작사한 곡이 세 곡, 작곡한 곡이 여섯 곡에 이르고 그룹의 이름과 동일한 제목의 “풍선”의 주인공이 엄인호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세 명의 앙상블은 조금 묘하다. 4인조 해바라기때처럼 각자의 역할분담이 명확한 앙상블이 아니기 때문이다. 해바라기의 경우 이정선, 이주호(2집에는 이광조), 한영애, 김영미의 목소리가 갈라지고 합해지는 절묘한 앙상블을 이루면서 ‘보컬 그룹’의 묘미를 보여주었던 반면, 풍선의 경우 마치 각자 솔로로 활동하던 3명의 ‘따로 또 같이’ 식의 프로젝트로 들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룹으로서의 응집력을 보여주는 작품은 아니다. “젊은 연인들”과 “여름” 같은 대학생 가요제의 수상곡을 내세운 점도 이들의 1980년대 이후의 지위를 고려할 때 ‘이럴 때도 있었네’라고 실소를 자아낼 정도의 대목이다. 물론 “여름”은 이정선의 곡이지만 해바라기 2집의 음원을 그대로 수록하는 무성의가 보인다. [너무나 속상해/불새야 동산으로]의 또 다른 커버. ‘풍선&이정선’이라고 적혀 있다. 그렇다면 음반에서 찾을 것은 무엇일까. 음반의 앞뒷면에서 두 번째 트랙을 차지하고 있는 곡을 뒤바꾸면 이 음반은 앞면은 엄인호 작품집, 뒷면은 이정선 작품집이라는 성격을 띤다. 따라서 앞면에서는 엄인호의 초기의 작곡 스타일을, 뒷면에서는 이정선의 새로운 시도를 엿볼 수 있다. 엄인호의 곡들은 ‘습작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평에 어울릴 곡도 있지만 특유의 즉흥성이 번뜩이는 곡들이 있다. 뒤에 “골목길” 등에서 보여주는 이른바 ‘레게 블루스’의 리듬이 넘실거리는 “너무나 속상해”는, ‘음반 전체의 컨셉트를 이런 방향으로 밀고 나갔으면…’하는 아쉬움을 던지게 하는 곡이다. 토속 리듬과 민요 가락을 도입한 “엿장수”나 이정선 스타일로 작곡하려고 한 듯한 “이별”은 그리 성공적으로 보이지 않지만 ‘숙제’를 던진다는 의미에서 흥미로운 트랙들이다. 한편 반음으로 하강진행하는 베이스가 인상적인 “님의 모습”이나 교과서적 화성 진행과는 다른 조바꿈을 보이는 “풍선” 같은 경우도 그의 감각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뒷면에 수록된 컨트리-포크 스타일의 “고향 가는 길”은 엄인호의 또 다른 면을 보여준다. 문제는 이런 아이디어들이 제대로 정돈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건 장발 전과(?)가 수십회에 달한다는 평소의 모습과 달리 단정한 헤어스타일을 한 엄인호의 모습과 비슷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로서는 편곡을 이정선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주선율의 보컬을 이광조가 맡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일까. 답이 어떻든 간에 엄인호가 편곡 능력을 갖추고 스스로 보컬을 맡았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한편 뒷면은 이정선의 색깔이 농후하다. “불새야 동산으로”는 어쿠스틱 기타의 마이너 코드의 해머링이 인상적인 곡이고, 비슷한 시기에 발표되어 이광조가 부른 “나들이”와 비슷한 스타일의 곡이다. 이를 ‘이정선식 (통)기타 블루스’라고 부를 수 있을까. 뭐라고 부르든, 이정선의 블루스(및 재즈)의 원용은 벤딩 주법과 감화음과 증화음으로 수놓은 “젊은 연인들”의 편곡이나 세븐쓰 코드의 야하고 느끼한 느낌으로 도배한 “통영 개타령”의 편곡에서 슬며시 드러나다가 마지막 트랙 “아무 말도 없이 떠나요”에서는 전면적으로 드러난다. 질척거리는 트럼펫 소리가 나른한 셔플 리듬 위에서 베이스는 발장단처럼 느릿느릿 걸어다니고 키보드가 게으른 타건을 하는 동안 기타와 보컬은 ‘블루 노트’를 여기저기 새겨 놓는다. 이정선이 새로운 사조를 원용하는 방식은 때로 ‘교과서적’이라는 말을 듣기도 하지만 이 음반에서만큼은 자유롭고 실험적으로 보인다. 아마도 엄인호와의 결합을 통해서 그가 얻고 싶어했던 것이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이는 대중성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사후적 평가일 뿐이지만 ‘1970년대를 떠나 보내는 작품’이 되었다. 음반으로서의 일관성은 부족하다는 전반적 인상을 지울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시도된 포크, 블루스, 재즈 같은 서양 음악과 민요, 국악, ‘가요’ 같은 한국 음악이 뒤죽박죽된 실험은 이런 작별의 의식(儀式)으로서는 의미심장하다. 이후 세 명은 “아무 말도 없이 떠나요”라는 말처럼 뿔뿔이 헤어져서 각자 솔로로, 그룹으로 활동하게 된다. 엄인호와 이광조는 1984년 경 ‘음반사 직원과 가수’의 관계로 만나서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으로 대박을 터뜨렸고, 이정선과 엄인호는 1980년대 중반 신촌 블루스에서 다시 만나서 또 하나의 획을 긋는다. 이런 역사의 출발로서도 이 음반의 가치는 충분하다. 20030724 | 신현준 homey@orgio.net 0/10 수록곡 Side A 1. 너무나 속상해 2. 젊은 연인들 3. 엿장수 4. 님의 모습 5. 풍선 6. 이별 Side B 1. 불새야 동산으로 2. 고향가는 길 3. 여름 4. 통영 개타령 5. 들꽃 6. 아무 말도 없이 떠나요 관련 글 엄인호 vs 조동익: 후광보다 더 밝게 비친 언더그라운드의 두 불빛 – vol.5/no.13 [20030701] 10년의 고독, 20년의 블루스, 30년의 방랑: 엄인호와의 인터뷰(1) – vol.5/no.13 [20030701] 10년의 고독, 20년의 블루스, 30년의 방랑: 엄인호와의 인터뷰(2) – vol.5/no.13 [20030701] 조동진 vs 이정선: ‘한국형’ 싱어송라이터의 두 개의 초상 – vol.5/no.11 [20030601] 예외적 포크 싱어, 어쿠스틱 블루스맨 : 이정선과의 인터뷰 – vol.5/no.11 [20030601] 장끼들 [별/첫사랑] 리뷰 – vol.5/no.13 [20030701] 신촌 블루스 I(그대 없는 거리/아쉬움) 리뷰 – vol.5/no.13 [20030701] 신촌 블루스 [신촌 블루스 II(황혼/골목길)] 리뷰 – vol.5/no.13 [20030701] 신촌 블루스 [신촌 블루스 III(이별의 종착역)] 리뷰 – vol.5/no.13 [20030701] 엄인호 [환상/골목길] 리뷰 – vol.5/no.13 [20030701] 엄인호 [Sing The Blues] 리뷰 – vol.5/no.13 [20030701] 엄인호/박보밴드 [Anthology/Rainbow Bridge] 리뷰 – vol.5/no.13 [20030701] 관련 사이트 신촌 블루스, 장사익, 박보 팬 사이트 http://cafe.daum.net/junggam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