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끼들 – 별/첫사랑 – 대성음반, 1982 야생적 별종 히트곡들로 가득 차 있으되 히트를 치지 못한 음반. 어딘가 논리적인 결함이 있어 보이지만, 이야말로 지금 소개하는 앨범에 정확히 들어맞는 진술이다. 하기야 어느 면으로 보나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둘도 없는 별종에 속하는 장끼들의 작품이기에 이런 모순적 상황이 아주 어이없지만은 않다. 이 ‘히트곡’들이 원작자의 손을 떠나 다른 가수나 밴드에 의해 불려졌을 때 비로소 그 ‘진가’를 발휘한 것은 이들이 얼마나 별스럽게 혹은 희한하게 음악을 했는지를 방증하는 것이다. 이후 신촌 블루스 덕택에 대중적 지명도를 얻게 되는 엄인호를 제외한다면, 장끼들의 멤버들은 사람 이름보다는 각자의 대표곡 이름으로 소개를 하는 편이 더 알기 쉬운 것도 그 때문이다. 엄인호와 오랜 친분이 있었던 미 8군 무대 출신의 박동률은 남궁옥분을 스타덤으로 끌어올린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를 만들었고, 항공대 그룹 사운드 활주로의 핵심 멤버였던 라원주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 “이빠진 동그라미” 등 배철수가 간판으로 나선 활주로-송골매의 ‘한국적 록’을 작곡한 인물이다. 엄인호의 “골목길”, “바람인가”도 포함해서 열거한 곡들 모두 장끼들의 음반에 들어가 있다. 장끼들이 어떤 인연으로 모였다 흩어졌고 왜 그런 ‘괴상한’ 이름을 갖게 되었는가에 대한 흥미로운 뒷얘기들은 엄인호를 비롯한 관련 인물들과의 인터뷰에서 찾아볼 수 있으니 여기서는 주로 음악에 초점을 맞춰 보자. 마지막에 어설프게 낑겨들어 있는 민요가락 장송곡 “울타리 너머로 가시는 임”을 빼놓는다면 음반은 세 명의 송라이터에게 각각 세 곡씩 동등하게 3분되어 있고, 노래도 각자 자기의 곡을 직접 불렀다. 이런 표면상의 평등함은 실제로 그 밑에서 일어나는 복잡미묘한 힘겨루기의 결과인 경우가 다반사이지만, 듣는 이의 입장에서 그런 사정까지 다 알아야 음악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닐 터이다. 다만 이런 명확한 분할이 종종 ‘밴드의 음악’이 아닌 ‘개인의 음악+반주’로 귀결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은 생길 법도 하다. 그러나 일단 첫 곡 “별”을 들으면 그런 의심은 다소 사그라든다. 앞서 언급한 곡들과 달리 오직 장끼들에 의해서만 연주된 이 곡은 밴드의 특색과 강점을 총괄한 탁월한 작품이다. 베이스 드럼이 처음 두 비트를 생략하고 세 번째에서만 한번 킥을 넣어주는 이른바 원 드롭(one drop), 능란하게 선율을 이끌어 가는 베이스 기타, 첫 번째 백비트에 한 번, 두 번째는 짧게 두 번 액센트를 가하는 리듬 기타는 정확히 레게의 그것이다. 한국 밴드로서는 최초로 시도한 것으로 여겨지는 레게 리듬만으로도 그 독특함을 인정받을 만하지만, 그저 자메이카 음악을 베낀 게 아니라는 데서 이들에게 더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이 리듬에 얹힌 라원주의 곡은 멜로디와 코드 진행 면에서 활주로 시절의 곡들과 크게 차이를 보이지 않음에도 분위기는 매우 색다른 것이 된다. 같은 말이라도 ‘아’다르고 ‘어’다르다라는 속담이 있는 것처럼, 어느 박자에 강세가 주어지느냐에 따라 같은 음악도 달리 들린다는 것이다. DJ 출신으로 다양한 음악을 접해왔던 엄인호를 제외하고는 심지어 베테랑 드러머인 양영수조차도 잘 몰랐다는 이 새로운 리듬의 도입은 즉각적으로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어냈고, 이는 멤버 각자의 철저한 영토관리에도 불구하고 장끼들에게서 ‘밴드의 음악’을 찾을 수 있는 최소한의 근거가 된다. 밥 말리라는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았던 그 시절 한국에서 이들이 별종으로 취급된 것도 결국 이 스타일의 탓이겠지만. 원 드롭이 이어지는 “골목길”과, 박동률이 원래 포크 스타일로 작곡한 것을 엄인호가 블루스로 편곡했다는 “나그네의 옛이야기”는 각각 고인이 된 김현식과 투병중인 박인수의 버전으로 대중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박인수에 비한다면 “나그네의 옛이야기”에서 박동률의 보컬은 좀더 토속적이지만 아무래도 그만큼 착착 휘감기지는 않는다. 이정선에 따르면 ‘막기타의 대가’인 엄인호가 특유의 블루스 ‘감’ 넘치는 연주로 보컬 멜로디를 따라가며 화답함으로써 어느 정도 보완이 이뤄지지만, 다른 편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기타 아르페지오는 불필요하게 여백을 채우며 신경을 거슬린다. “처음부터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는 작사 이응수/작곡 라원주라는 활주로-송골매의 ‘한국적 록’ 파트너쉽이 만들어낸 초기 대표작들, “처음부터 사랑했네-세상 모르고 살았노라-이빠진 동그라미-탈춤”을 한데 엮은 메들리이다. 이 또한 아이디어는 참신하지만, 배철수의 텁텁한 보컬이 빠지니 뭔가 제 맛을 못 살리는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자메이카 레게 음악이 1950-60년대 미국의 소울 및 리듬 앤 블루스를 밑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장끼들이 자신들의 지향을 가리켜 ‘레게 블루스’라고 한 것은 좀 기묘하게 들리기도 한다. (일례로 밥 말리의 “I Shot The Sheriff”에 대한 에릭 클랩턴의 커버 버전을 레게 블루스라고 부르는 것은 장황한 설명의 과잉일 뿐이다.) 하지만 블루스와 레게가 각각 분리되어 수용된 한국적 맥락에서 보면 이는 납득할 수 있는 일이다. 블루스라는 단순하면서도 다양하고 풍부한 표현력을 지닌 음악 형식은 이미 오래 전부터 한국에 뿌리내려 ‘토착화’의 길을 걸은 데 반해, 레게는 당시로서는 생경한 이국적인 리듬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레게 블루스란 정확히 말하면 ‘레게 리듬 + (한국형) 블루스’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엄인호의 “골목길”이 김현식의 목소리를 통해 새 생명을 부여받고 레게 블루스의 영원한 송가로 자리잡았다면, 이 음반에 뒷면 첫곡으로 실린 박동률의 “첫사랑”은 그럴 기회를 아깝게 놓친 불운한 싱글 B 사이드 같다는 인상을 남긴다. 앞면의 “별”이나 “골목길”에서와는 달리 좀더 록 음악의 관습에 가깝게 1박과 3박에 킥을 넣는 투 드롭(two drop)을 채용한 리듬은 두 대의 기타와 어우러져 훵키하고, 어딘지 모르게 투코리안즈(김도향, 손창철)의 스타일을 연상시키는 박동률의 보컬은 한국적 블루스의 토속성이 미시시피 델타에서 유래한 것이 아님을 강변하는 듯하다. 이처럼 멤버 각각의 기(氣)가 한데 어우러지는 곡들이 끝나고 각자의 개성을 선보이는 자리가 마련되는데, 그 결과는 마냥 신통치많은 않다. 특히 건전 가요풍으로 만들어진 라원주의 “함께 가는 사람들”이 그렇고,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도 남성이 중심 화자(話者)가 되니 왠지 신세타령처럼 들리는 구석이 있다. 고집 세고 개성 강한 이들이 의기투합하는 데는 한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나 할까. 결국 이들은 그 비상한 재능을 순간적으로 번득이는 데 그치고 각자의 길로 돌아서게 된다. 한국 록의 서로 다른 흐름들, 즉 미 8군 무대, 대학가 그룹 사운드, 통기타 포크 및 보헤미안 히피 공동체가 합류한 한 지점을 들국화에서 찾을 수 있었다면, 장끼들은 그 또 다른 지점을 보여준다. 두 밴드 모두 개성이 뚜렷하고 음악적 노선의 차이가 분명한 송라이터들이 한데 모여 전례없이 독특한 음악을 만들어냈지만 결국은 오래 가지 못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의 들국화가 유례없는 대중적 성공을 거둔 반면, 그보다 불과 몇 년을 앞서간 장끼들은 참담한 실패를 맛봐야만 했다. 만일 들국화와 비슷한 시기에 장끼들이 좀더 대중친화적인 사운드로 같은 곡들 을 들고 나왔다면 판도가 어떻게 달라졌을까. 이런 반사실적(反事實的) 질문을 그저 호사가적인 취미로만 돌리기엔 이 음반이 뒤늦게 발하는 빛은 너무 강렬하다. 20030703 | 김필호 antioedipe@hanmail.net 0/10 P.S. 1. 이질적 경력을 가진 이들 세 명이 함께 모일 수 있었던 것은 세칭 ‘신촌파'(혹은 ‘경주집파’)라고 불리는 1970년대 중반 이후 언더그라운드의 흐름이다. 한편 이 음반을 발표한 ‘대성음반’의 의미에 대해서는 별도의 글에서 다룰 것이다. 2. 의도한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장끼들’이라는 이름은 ‘송골매’와 대조적이다. 고공비행을 하는 조류와 땅에서 멀리 날지 못하는 조류의 대조. 3. 이 음반 외에 “태평성대” 등의 곡이 추가 수록된 또다른 버전의 음반이 하나 더 있다. 음반번호와 발매일은 동일하다. 라원주의 곡인 “태평성대”는 [젊음의 행진]같은 1980년대 초 TV 음악 프로그램에서 몇 번 소개된 일이 있다. 수록곡은 아래 추가한다. 수록곡 Side A 1. 별 2. 골목길 3. 나그네의 옛이야기 4. 처음부터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5. 비오는 날 Side B 1. 첫사랑 2. 함께 가는 사람들 3. (네 마음은) 바람인가 4.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 5. 울타리 너머로 가시는 임 장끼들 [낙엽지는 풍경/태평성대] Side A 1. 낙엽지는 풍경 2. 골목길 3. 바람인가 4. 처음부터 세상모르고 살았노라 5. 기적 Sids B 1. 태평성대 2. 함께가는 사람들 3. 나그네의 옛이야기 4.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 5. 울타리 너머로 가시는 임 관련 글 엄인호 vs 조동익: 후광보다 더 밝게 비친 언더그라운드의 두 불빛 – vol.5/no.13 [20030701] 10년의 고독, 20년의 블루스, 30년의 방랑: 엄인호와의 인터뷰(1) – vol.5/no.13 [20030701] 10년의 고독, 20년의 블루스, 30년의 방랑: 엄인호와의 인터뷰(2) – vol.5/no.13 [20030701] 조동진 vs 이정선: ‘한국형’ 싱어송라이터의 두 개의 초상 – vol.5/no.11 [20030601] 예외적 포크 싱어, 어쿠스틱 블루스맨 : 이정선과의 인터뷰 – vol.5/no.11 [20030601] 풍선 [너무나 속상해/불새야 동산으로] 리뷰 – vol.5/no.13 [20030701] 신촌 블루스 I(그대 없는 거리/아쉬움) 리뷰 – vol.5/no.13 [20030701] 신촌 블루스 [신촌 블루스 II(황혼/골목길)] 리뷰 – vol.5/no.13 [20030701] 신촌 블루스 [신촌 블루스 III(이별의 종착역)] 리뷰 – vol.5/no.13 [20030701] 엄인호 [환상/골목길] 리뷰 – vol.5/no.13 [20030701] 엄인호 [Sing The Blues] 리뷰 – vol.5/no.13 [20030701] 엄인호/박보밴드 [Anthology/Rainbow Bridge] 리뷰 – vol.5/no.13 [20030701] ‘해변가요제’ 4반세기를 기념하며… (산울림, 송골매 특집) – vol.5/no.17 [20030901] 관련 사이트 신촌 블루스, 장사익, 박보 팬 사이트 http://cafe.daum.net/junggam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