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인호 – 환상/골목길 – 서라벌, 1985 중간결산과 암중모색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엄인호의 첫 솔로 앨범이다. 앞면과 뒷면을 차지하고 있는 트랙인 “환상”과 “골목길”은 ‘어, 이 노래들이 이때부터 있었어?’라는 반응을 나오게 할 것이다. 그가 가장 애착을 갖는 “도시의 밤”도 수록되어 있다. 혹시나 해서 부연한다면 “골목길”은 김현식의 노래를 통해, “도시의 밤”은 “그대 없는 거리”라는 제목으로 바뀐 뒤 한영애가 부른 노래로 준(準) 대박을 기록한 곡들이다. 물론 엄인호가 직접 부른 노래로 유명해진 “바람인가”도 이 음반에 이미 수록되어 있다. 엄인호의 경력에서 볼 때 이 음반은 1970년대 말의 ‘통기타 중창단’ 풍선과 1980년대 초의 ‘5인조 그룹 사운드’ 장끼들에서의 활동과 1980년대 말 신촌 블루스에서의 활동 사이의 시점에 나온 것이다. 이런 정황을 고려한다면 이 음반에 풍선 시기의 ‘포크’와 장끼들 시기의 ‘레게’ 그리고 신촌 블루스 시기의 ‘블루스’의 요소가 혼재되어 있는 것은 자연스럽다. 한 예로 “골목길”은 일정한 변형을 거치기는 했어도 레게 리듬에 바탕을 두고 있고, “도시의 밤”과 (뒷 면에 수록된) “바람인가”는 색서폰과 어우러진 블루스 넘버들이다. “푸른 계절”은 ‘1970년대 포크송’의 전형적 스타일이고(여자와의 듀엣이다), “바보처럼 보일 거에요”는 마치 이정선이 작곡한 곡처럼 들린다. 그리고 앞면에 수록된 “바람인가”의 어쿠스틱 버전은 이들 사이 어딘가에 있다. 따라서 좋게 말하면 다양한 스타일을 추구한 실험적 음반일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아직도 스타일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음반일 것이다. 이영재(기타), 허성욱(건반), 양영수(드럼) 등 당시 언더그라운드에 실력을 검증받은 세션 연주자들의 연주도 수준급의 기량을 드러내고 있지만 이렇다 할 개성을 드러내고 있지는 않다. 이색적인 트랙도 있다. 첫 트랙인 “환상”과 앞면 마지막 트랙인 연주곡 “을숙도”이다. “환상”은 신씨사이저의 뿅뿅거리는 효과음과 더불어 기계적인(=’나이트클럽’풍의) 리듬 패턴이 반복된다. 당시 발표되었던 곡들 가운데 이재민이 부른 “골목길”을 엄인호가 부른다고 상상하거나, 나미가 부른 “빙글빙글”이 단조의 멜로디를 가지고 있다면 이 곡과 비슷했을 것이다. ‘너무 시대를 앞서가서 실패했다’는 평에 어울리는 곡이자 ‘지금 들으면 전자음향이 촌스럽다’라는 평이 나올 만한 곡이다. 어떤 의미에서든 불운한 곡이다. 한편 “을숙도”는 엄인호가 음반을 제작한 6인조 밴드 우리의 리더인 정수현의 곡이로 프로그레시브 록 스타일의 시사이저, 신비로우면서 소름끼치는 여성의 스캣, 블루지한 톤의 기타 연주가 등장하는 대곡 스타일이다. 당시 ‘언더그라운드’ 음악인들이 프로그레시브 록에 심취해 있음을 알려주는 좋은 사례다. 아마도 여성의 스캣은 르네상스(Renaissance)의 애니 해슬램(Annie Haslam), 블루지한 기타 톤은 데이빗 길모어(David Gilmour)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뒷면 마지막을 장식하는 “사랑의 계절”은 엄인호의 ‘팝’ 혹은 ‘발라드’의 감각을 보여 준다. 3박자의 월츠풍의 살랑거리는 리듬 위에서 원만하게 덥혀진 기타와 피아노의 편곡, 그리고 엄인호의 노래 가운데 가장 달콤한 창법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이문세를 스타덤에 올려준 이영훈이 한때 엄인호의 밴드에서 키보드를 연주했고, 이광조를 스타로 만들어 준 음반(팝 발라드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 수록된 음반)을 엄인호가 제작했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래도 음반 전체적으로 초점이 없다는 느낌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다. 그렇지만 “도시의 밤”에서의 자연스러운 전조(轉調)와 “바람인가”에서 베이스음의 반음 하강 진행을 들으면 그의 작곡이 비범하다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가요’로서는 ‘어렵다’는 평을 들었을 만한 대목인데, 그걸 작위적이지 않게 요리하는 것이 엄인호의 재능인 것 같다. 만약 뒤늦게 이 음반을 찾아 듣고 범상하게 넘어갔다면 그건 뒤에 신촌블루스 등의 연주를 통해 자주 들어서 익숙해졌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는 아닐 것이다. 그래서 신촌 블루스 이후에 비해 무언가 자신감이 없어 보이는 사운드도 고독, 방황, 주저, 좌절 등 당시 그가 가졌던 정서에 걸맞는디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볼 때 이 앨범에서의 모색이 그의 경력의 도약대가 되었다는 점은 두 말하면 잔소리일 것이다. P.S. 비하인드 스토리 엄인호가 작곡을 처음 시작한 것은 부산에서 DJ 생활을 하던 1977년 한 여자와 사랑과 이별을 맞은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의 최초의 작품들이 탄생한다. 그 가운데 하나인 “사랑의 계절”의 경우 원 제목은 “1978년 가을 편지”였고, 이 곡이 그의 첫 작품이다. ‘1977년’이 아니라 ‘1978년’이 된 것은 그의 착각이었다고 한다. 어쨌든 이 곡은 ‘히피적’인 삶으로 방황하던 그를 음악의 길로 인도한 곡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는 어쿠스틱 기타의 반주만으로 부르는 연가인데, 이 곡을 포함하여 “골목길”, “아쉬움” 등에서 그의 ‘낭만적’ 가사들은 이런 배경을 가지고 탄생한 것이다. 20030703 | 신현준 homey@orgio.net 0/10 수록곡 Side A 1. 환상 2. 도시의 밤 3. 바람인가 4. 푸른 계절 5. 을숙도 Side B 1. 골목길 2. 바람인가 3. 바보처럼 보일 거에요 4. 사랑의 계절 5. 산에 산에는 관련 글 엄인호 vs 조동익: 후광보다 더 밝게 비친 언더그라운드의 두 불빛 – vol.5/no.13 [20030701] 10년의 고독, 20년의 블루스, 30년의 방랑: 엄인호와의 인터뷰(1) – vol.5/no.13 [20030701] 10년의 고독, 20년의 블루스, 30년의 방랑: 엄인호와의 인터뷰(2) – vol.5/no.13 [20030701] 조동진 vs 이정선: ‘한국형’ 싱어송라이터의 두 개의 초상 – vol.5/no.11 [20030601] 예외적 포크 싱어, 어쿠스틱 블루스맨 : 이정선과의 인터뷰 – vol.5/no.11 [20030601] 풍선 [너무나 속상해/불새야 동산으로] 리뷰 – vol.5/no.13 [20030701] 장끼들 [별/첫사랑] 리뷰 – vol.5/no.13 [20030701] 신촌 블루스 I(그대 없는 거리/아쉬움) 리뷰 – vol.5/no.13 [20030701] 신촌 블루스 [신촌 블루스 II(황혼/골목길)] 리뷰 – vol.5/no.13 [20030701] 신촌 블루스 [신촌 블루스 III(이별의 종착역)] 리뷰 – vol.5/no.13 [20030701] 엄인호 [Sing The Blues] 리뷰 – vol.5/no.13 [20030701] 엄인호/박보밴드 [Anthology/Rainbow Bridge] 리뷰 – vol.5/no.13 [20030701] 관련 사이트 신촌 블루스, 장사익, 박보 팬 사이트 http://cafe.daum.net/junggam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