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인호 – Sing The Blues – 동아기획/서라벌, 1990 ‘블루스’와 함께 춤을 이 음반은 엄인호가 신촌 블루스의 석 장의 정규 앨범을 낸 뒤 발표한 솔로 음반이다(물론 엄인호의 ‘최초의’ 솔로 음반은 1985년작이다). 그가 가장 자유롭게 녹음했기에 스스로 그만큼 애착도 많이 가지고 있다는 음반. 관점에 따라서는 전과 다르게 엄인호가 오버드라이브나 코러스 등 다양한 이펙트로 아기자기한 기타 톤을 만들었다는 점은 당시 그의 입장에서 나름의 새로운 시도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기타는 전면에 부상하기보다는 피아노나 오르간 등의 건반 악기가 다채로운 운용과 조화되는 면모를 보여준다. 이런 점은 당시 신촌 블루스 3집도 마찬가지 현상인 듯한데, 이정선이 나간 후 한 그룹을 개편해야 하는 상황 속에 그가 택한 선택이 아닐까. 무엇보다도, 진한 ‘블루스 필’의 색소폰과 오르간에, 간간히 삽입된 아기자기한 기타가 어우러지는 “갈등”이나, 정서용, 정경화의 강한 여성 백업보컬과, 이들보다 더 잠깐 등장해 일순 명멸해 버리는(그러나 그의 것임을 단박에 알 수 있는) 흡입력 강한 박인수의 보컬이 엄인호의 잔잔한(!) 노래에 맛깔스런 양념을 치는 “그대 없는 거리”가 ‘엄인호식 블루스’의 양상을 잘 보여준다. 이 음반에서 가장 경쾌하고 빠르게 다가오는 곡 “너의 맘 속에 잊혀진 나는”의 경우에는, 전주부터 리드하던 기타가 이후 화려한 솔로로 이어져, 이 음반에서 기타의 느낌이 가장 강하게 부각되는 곡으로 낙점된다. 물론 그가 당시 원했던 ‘한국적(?) 블루스’에 대한 상을 잘 알 수 있는 곡은 “Blues For R.B.”으로 보인다. 간간히 울부짖는 듯한 기타, 울부짖는 보컬로, 그가 당시 무척 좋아했다는 ‘로이 부캐넌을 위한 블루스’를 만들었다(연주곡 버전으로도 삽입했다). 특히 “너의 맘 속에 잊혀진 나는”이나 “갈등” 등에서도 들을 수 있는 이 허스키함이 배어있는 절규의 목소리는, 그러나 일탈이나 무도한 것이 아닌 다소 절제된 것이다. 도시적인 허무한 감정, 낭만의 보헤미안 정서를 담겨 있다는 점은 하나 마나 한 소리일지 모르지만. 반면 블루스적 스펙트럼으로부터 멀어지는 순간 그것은 서정적인 발라드(혹은 ‘포크’?)쪽으로 기운다. “’78 가을 편지”는 이 음반에서 가장 고요하고 속삭이는 듯한 노래일 것이다. 기교를 없앤 간단한 아르페지오 음형의 어쿠스틱 기타, 부드러운 선율을 담당하는 플루트의 간소한 반주에 허스키한 톤 대신 나직한 목소리가 입혀진다 이런 ‘외도(?)’는 다른 각도에서도 이루어진다. 첫 곡 “첫사랑”이 바로 그 곡인데, 사실 외도가 아닌 엄인호 본연의 특기 중 하나였던 레개 리듬을 이용한, 말하자면 “골목길”을 연상케 하는 스타일의 곡이다. 물론 박동률(장끼들)은 물론 김현식(신촌 블루스)의 카리스마 강한 보컬과는 다른 식으로 노래한다. ‘부족했다’는 그의 고백은 이런 지점과도 맞물려 있는 게 아닐까. 셋잇단 음표로 이어지는 피아노 음형과 색소폰을 비롯한 관악기들이 조우하는 미드 템포의 “마틸다”나 아스라하게 울려퍼지는(목욕탕처럼 습기가 잔뜩 머금어 있는) 음향의 “달빛아래 춤을”은 앞서 이야기한 발라드 계열로 가려는 순간, 다시 엄인호만의 가요풍 블루스의 범주로 되돌아온다. CF 송으로 쓰이기도 했던 곡으로 본인이 손꼽는 작품으로 (그가 자주 선보이곤 했던) 여성 배킹 보컬들의 아스라한 목소리가 빈 공간에 점하고 있으며 서정적인 감각의 기타가 은연 중에 살아 나온다. 물론 이 음반에는 그를 도와준 이들은 생각보다 많다. “갈등”이나 “그대없는 거리” 등에서 들리는 색소폰 연주는 그의 형인 엄인환의 것이다. 또한 그가 ‘서던 락 냄새가 물신 나는’, 그래서 자신과 잘 맞는 기타리스트라고 호평한 최구희도 리듬 기타도 동반되어 있다. 물론 드러머(양영수, 정태국), 키보드(안동열, 동영욱, 육태행) 등도 엄인호 솔로 음반의 조력자다. 연주자 뿐일까. 앞서 이야기 했던 “첫사랑” 노래의 작곡자 박동률도 빼놓을 수 없으며 “빨간 스웨타의 여자”를 작곡한 강문수는 1989년 사군자라는 이름으로 음반을 낸 바 있으며 지금도 엄인호의 공연에서 음향을 맡기도 했던 지우이다. 작사자들 역시 엄인호와 여러 가지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다. 김미선은 서울음반에 적을 두기도 했던 작사가로 서울음반으로 엄인호를 스카우트하기도 했다. 1980년 초에 알게 되어 당시 “골목길” 등으로 음반을 내려던 가수 지망생 윤미선은 “너의 맘속에 잊혀진 나는”을 작사했다. 그가 나름대로 포진시킨 인맥들과 함께 엄인호는 이 음반을 통해 나름의 자리를 재배치하려는 노력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이는 그의 기타가 아닌, 다양한 분위기의 건반악기 혹은 색소폰 같은 악기들에서 나왔다. 기타 톤 역시 다양하다는 점은 앞에서도 지적했었다. 또한 이전에 그가 실었던 곡들을 제목을 바꾸어 편곡하고(“첫사랑” “그대 없는 거리”, “’78, 가을편지” 등), 그가 좋아했던 뮤지션을 위한 송가를 삽입한 것(“Blues For R.B.”) 등도 그런 노력의 일환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들에게서 ‘파격’은 없다. 새로운 파장을 원했다면 이 음반은 성공작은 아니다. 많은 곡들이 또한 과거의 어딘가에서 왔다. 게다가 그만의 (막 치는 것 같지만 무언가 그만의 감각이 담긴) 기타가 강하게 두드러지기를 기대했다면 실망스러울 수도 있다. 이 음반의 구성은 블루스뿐 아니라 포크, 레게까지 담아냈다는 면에서 1985년의 솔로 음반과 그 형식이 비슷하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나름의 일관된 편곡으로 곡들 사이의 차이점이 봉합되었다는 점에서는 후한 점수를 줄 수 있으리라. 20030526 | 최지선 fust@dreamwiz.com 0/10 P.S. 1. “그대없는 거리”는 “도시의 밤”으로도 잘 알려진 노래로, 엄인호가 가장 아끼는 버전은 이 앨범에 실린 버전이다. 2. “첫사랑”은 장끼들을 비롯해 그와 세션 연주자로 활동한 바 있는 막역지우 박동률의 곡이다. 3. “’78, 가을편지”는 1985년 엄인호의 솔로 첫 음반에서 “사랑의 계절”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된 바 있다. 4. 이 솔로 앨범 직후 엄인호는 곽재용 감독의 영화 음악 [가을여행]을 맡기도 했는데 이 두 음반은 뉴서울 레코드에서 녹음되었다. 수록곡 Side A 1. 첫사랑 2. 갈등 3. 마틸다 4. 빨간 스웨타의 여자 5. Blues For R.B. Side B 1. 달빛아래 춤을 2. 그대없는 거리 3. 너의 맘속에 잊혀진 나는 4. ’78, 가을편지 5 Blues For R.B. (연주곡) 관련 글 엄인호 vs 조동익: 후광보다 더 밝게 비친 언더그라운드의 두 불빛 – vol.5/no.13 [20030701] 10년의 고독, 20년의 블루스, 30년의 방랑: 엄인호와의 인터뷰(1) – vol.5/no.13 [20030701] 10년의 고독, 20년의 블루스, 30년의 방랑: 엄인호와의 인터뷰(2) – vol.5/no.13 [20030701] 조동진 vs 이정선: ‘한국형’ 싱어송라이터의 두 개의 초상 – vol.5/no.11 [20030601] 예외적 포크 싱어, 어쿠스틱 블루스맨 : 이정선과의 인터뷰 – vol.5/no.11 [20030601] 풍선 [너무나 속상해/불새야 동산으로] 리뷰 – vol.5/no.13 [20030701] 장끼들 [별/첫사랑] 리뷰 – vol.5/no.13 [20030701] 신촌 블루스 I(그대 없는 거리/아쉬움) 리뷰 – vol.5/no.13 [20030701] 신촌 블루스 [신촌 블루스 II(황혼/골목길)] 리뷰 – vol.5/no.13 [20030701] 신촌 블루스 [신촌 블루스 III(이별의 종착역)] 리뷰 – vol.5/no.13 [20030701] 엄인호 [환상/골목길] 리뷰 – vol.5/no.13 [20030701] 엄인호/박보밴드 [Anthology/Rainbow Bridge] 리뷰 – vol.5/no.13 [20030701] 관련 사이트 신촌 블루스, 장사익, 박보 팬 사이트 http://cafe.daum.net/junggam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