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2003년 6월 2일 장소: 고양시 중산의 연탄갈비집 질문: 신현준, 황혜림 정리: 최지선, 신현준 작년 연말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에서 열린 장필순의 공연이 끝나고 대기실에서 잠시 하나기획 식구들과 인사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이 콘서트는 정말 좋았다!). 조동익은 잘 보이지 않았는데 갑자기 옆에서 어떤 사람이 내게 말을 걸었는데 고개를 돌려보니 이런 조동익이었다. 몇 차례 짧게 인사를 나눈 적이 있지만 그리 친분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때 그가 한 말은 “요즘 [weiv] 자주 들어가 봐요”라는 말이었다!!! ‘예의상’ 했던 말일 수도 있겠지만 순간 굉장한 보람감을 느꼈다(아, 인간이 이렇게 단순하다니…) 그렇지만 조금 뒤 굉장한 보람감은 굉장한 부담감으로 돌변했다. 그 ‘부담감’은 조동익이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들 가운데 하나라고 내가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weiv]처럼 누추하고 허술한 곳을 찾아온다니… 이건 나의 주관적 판단만은 아닐 것이다.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일일이 이름을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가수들 음반’에 ‘편곡과 세션’을 맡았다는 것이 그의 업적 가운데 하나다. 물론 이런 직업적 실천 외에 1980년대 후반 기타리스트 이병우와 함께 만든 듀엣 어떤날에서 베이스와 보컬을 맡아서 ‘어떤 감성’을 만들어내며 지금도 컬트로 남아 있다. 1990년대 그가 만들어낸 감각적인 영화음악들도 빼놓을 수 없는 그의 업적이다. 그가 그저 ‘컬트’로 남아있는 듯한 현재의 상황은 나같은 사람에게는 ‘불편한’ 일이다. ‘하나음악’의 모든 것을 떠안고 있는 그의 현재의 여정도 그리 편안해 보이지는 않는다. 요즘 ‘제대로’ 음악을 해보겠다는 사람들의 공통된 운명이기는 하지만, 하나음악처럼 ‘느리지만 철저한 것’을 목표로 활동하는 사람들에게는 요즘대중음악계의 분위기는 너무 낯선 것이리라… 하나음악에서 [꿈]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옴니버스 음반’이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신보를 미리 들어보는 영광도 누릴 겸해서 조동익을 비롯한 하나음악 식구들과 만났다. ‘인터뷰’를 제의했지만 ‘피차 서로 사정 다 알 만한 사이에 무슨 인터뷰냐’라는 식의 반응으로 인해 인터뷰는 ‘술자리’로 대체되었다. 그래서 소줏잔과 돼지갈비가 오가는 사이에 마이크를 두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떤날에서 활동할 때의 이야기가 많이 생략된 이유는 이런 분위기 때문이었다. 어떤날에 대해서는 그런 대로 많은 정보를 알 수 있으니까 서운하더라도 다음을 기약하고 넘어가자. 이렇게 인터뷰를 비공식적으로 추진한 것에 만족했던 것은 1999년 3월 영화 [내 마음의 풍금]의 개봉을 앞두고 [씨네 21]에 쓸 기사를 위해 조동익과 인터뷰를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믿는 구석’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때 인터뷰를 하면서 미처 잡지에 싣지 못했던 부분들과 영화음악과 관련된 부분을 재정리해 취합해 보았다. 당시 조동익 인터뷰를 ‘수기(手記)’한 뒤 4년이 지난 지금 정리해 준 황혜림 [씨네 21] ‘해직기자(^^)’의 능력에도 경의와 감사를 표한다. 처음에는 ‘이걸 취합한다고 글이 될까…’라는 걱정이 있었지만 취합하고 보니 그럭저럭 글이 되었다. 조동익의 성장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동방의 빛(강근식, 조동진, 조원익, 이호준, 배수연, 유영수 등)의 이야기, 양병집, 최성원, 김광민 등 음악적 선배나 동료들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 스튜디오 세션맨으로 젊은 시절을 ‘허비’한 이야기, 영화음악 작업에 관한 구체적 뒷이야기들, 그리고 하나음악의 무거운 짐을 지고 가면서도 꿋꿋이 버텨나가는 이야기, 그리고 ‘뜨거운 감자’ mp3에 대한 이야기 등 비교적 다양한 이야기 등등. 물론 인터뷰의 목적은 새 음반 [꿈]이었으므로 여기 참여한 조동익의 후예들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들어갔다. 그런 의미에서 이날 인터뷰 아닌 인터뷰에 동석해서 좋은 이야기를 들려준 신진, 장필순, (더 버드의) 김정렬, 이다오 등 하나음악의 다른 식구들에게도 이 자리를 빌어 감사를 전한다. ‘동방의 빛’의 휘광에 사로잡혔던 성장기 Q: 어린 시절 살던 곳은 어디인가요? 어떤날의 “노란 대문”이라는 노래가 떠오르네요. – 인현동에 있었던 영희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서울의 변두리라는 곳은 살아보지 않은 곳이 없어요. 노란 대문이 있던 집은 정릉에 있던 집이고, 갈현동에 살던 때도 기억나고, 우이동에서도 살았던 적도 있어요. 학교는 전학을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어떨 때는 학교까지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다닌 적도 있어요. Q: 아무래도 조동익님의 경력은 조동진님의 활동과 불가분할 것 같습니다. 조동진 님이 1960년대 미 8군 무대에서도 연주했고, 1970년대에도 밴드에서 기타 연주자로 활동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때의 음악이 조동익님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는지요. – 그때 동방의 빛이라고 있었어요. 이장희, 송창식 씨의 음반에 모두 세션을 담당했고 [별들의 고향]의 사운드트랙 작업도 하고 대단했던 분들이었죠. 제가 중학교 때 (조)동진 형이 동방의 빛에서 잠시 있던 적도 있었죠. 그래서 동방의 빛에 있던 형들과도 알게 되었는데, 그 형들이 핑크 플로이드나 킹 크림슨 같은 음악을 참 좋아했어요. 강근식, 이호준, 조원익, 배수연 같은 분들이죠. 특히 강근식 형에 대해 기억나는 한 가지 일화가 있어요. 그때는 동방의 빛을 그만 두고 CM송을 제작하는 ‘강 프로’를 경영할 때인데, (조)동진 형을 따라 꽁치골목이라는 곳을 지나서 있는 강 프로의 사무실에 간 적이 있어요. 그곳에 들어갔더니 기타가 종류별로 죽 늘어서 있더라구요. 요즘 많이 쓰지 않는 모델인 펜더 재즈마스터스가 놓여 있더군요. 케이스를 열고 보았더니 피크(삐꾸)가 이 종류, 저 종류 있었는데 그게 그렇게 예뻤어요. 그래서 (강)근식이 형 몰래 그 중에 하나 훔쳐 왔어요. 이제 와서 고백하는 것이지만. Q: 지금 들으면 음질이 조악하기는 하지만 동방의 빛의 연주는 선구적이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강근식 님 외에 동방의 빛의 다른 분들에 대한 기억도 있으면 말해 주시죠. – 베이스를 치던 조원익 형은 (조)동진 형과 절친한 사이고 1980년대 말에 서울음반에 문예부장으로 잇을 때나 하나음악 초기에 전체적 책임을 지고 이끌 때나 저희들과 가까이 있었죠. 배수연 형은 당시 나이트클럽같은 업소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드럼 잘 친다고 소문이 나서 그 당시 음악을 하고있던 사람이나 하려던 사람들이 수연형의 연주를 들으려고 많이들 찾아갔었다고 들었어요. 드럼의 신동이라고나 할까요. 다른 분들보다는 연배가 조금 아래였어요. Q: 한 분이 빠진 것 같군요. 아, 이호준 님이 있군요. – 이호준 형의 경우는 ‘건바너’였죠. 키보디스트 말에요. 그때는 장난삼아 ‘건바너’라고 불렀어요. 그때 건치는 사람들이 별로 없을 때였죠. 그럴 때 (이)호준이 형이 “별들의 고향”에서처럼 신씨사이저 무그로 새로운 음악을 만들었죠. 물론 무그라고 해봐야 한음밖에 안 나는 모노 무그나 폴리 무그였지만… 뒤에는 사랑과 평화의 김명곤 형같은 분도 나왔지만 두 사람이 한국에서 키보드 연주자로는 잘 나갔던 분이죠. 스타일은 조금 다르지만. Q: 저는 처음에는 조동익 님의 음악이 동방의 빛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을 못 했지만 나중에 어떤 관련을 찾게 되더군요. 이를 테면 ‘음반다운 음반’을 내 놓았다는 점, 그 당시에 ‘프로듀싱’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음반을 제작했다는 점이 하나 음악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또한 동방의 빛이 오리엔트 프로덕션의 전속 밴드처럼 연주해서 음반의 색깔을 결정한 것처럼 ‘조동익의 밴드’도 하나음악의 색깔을 결정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전체적인 음악 스타일은 다르지만… –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저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과도기적 존재같아요. 완전히 요즘 세대도 아니고 형들 세대도 아니어서 이것도 좀 알고 저것도 좀 아는… 어떤 관점에서 보면 그 옛날 분들이 참 부럽고 멋있기도 해요. 그때는 ‘하면 된다’는 게 통하는 때였는데, 요즘은 오히려 ‘해도 안 되는’ 분위기니까…(쓴 웃음) Q: 오리엔트 프로덕션의 ‘전설적인 프로듀서’인 나현구 사장과는 관계할 일이 없었나요? – 이야기만 많이 들었죠. 한참 지난 후에 멀리서 그런 얘기 들어보고 “아, 멋있다”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당시에는 몰랐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무척 특이한 분이었어요. 그분이 운영하는 스튜디오에는 딱 한 번 가 봤어요. 역촌동에서 원남동으로 스튜디오를 이사한 다음의 시절이었죠(주: 조동진의 “제비꽃”이 수록된 정규 3집 음반을 녹음한 곳이다). 거기 들어가 보니까 없는 악기가 없는 거예요. 한쪽 벽에 어쿠스틱 기타, 일렉트릭 기타들이 좍 놓여 있고 그 가운데 이상한 기타도 있어서 뚜껑을 열어 봤더니 도브로 기타였어요. 건반악기도 여러 종류가 좍 있고… 그밖에도 신기한 게 하도 많아서 ‘도대체 여기 뭐 하는 데야’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뒤에 알고 보니 그게 스튜디오라고 하더군요. 물론 어떤 기타들은 곰팡이도 나고 녹슨 것도 있었어요. 그래도 하지만 그런 것들이 모두 그대로 보관되어 있더군요.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만 해도 나현구 사장의 사업이 많이 쇠퇴한 상황이어서 그랬을 것이라는 생각도 드네요. 그때는 이미 (강)근식이 형 세대들이 다 독립을 한 다음이니까. Q: 동방의 빛과 오리엔트 프로덕션이 와해된 것은 아무래도 1975년 말의 대마초 파동 때일 것입니다. 아직 나이가 어렸을 때이지만 그때의 기억은 있는지요? – 이런저런 말을 들은 건 있지만 그건 그 형들에게 직접 물어보시는 게 좋을 거에요. 저야 아직 어릴 때였고 주워들은 말들이니까요. 신촌 카페의 DJ, 음악인의 길을 준비하다 Q: 어느 순간부터 음악을 하겠다고 마음 먹은 건지요. 이른바 ‘결정적 계기’라고 할 만한 것 말입니다. 음악 활동을 시작하기 전 어떻게 음악을 듣고 연습을 했는지 궁금합니다. – 어느 순간 갑자기 음악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건 아니고, 어려서부터 조금씩, 초등학교 때부터 차곡차곡 쌓여왔던 것이겠죠. 큰 형(조동완)이 오디오에 관심이 많았는데, 진공관 앰프을 직접 만들기도 했어요. 그리고 (조)동진이 형이 음악 하려고 할 때 어깨 너머로 형이 기타 치는 모습을 보았고… 당시 우리 집에는 LP도 많은 편이어서 당대의 팝송을 모두 LP로 들을 수 있었죠. 비틀즈의 어떤 음반은 앞뒷면 모두를 달달 외울 정도로 들은 적도 있어요. 그러면서 차츰차츰 음악에 매력을 느꼈죠. 그러니 초등학교 때부터 음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싹터 왔다고 할 수 밖에요. 초등학교 들어가기도 전에 형이 치던 기타를 잡아보기는 했지만 제대로 노래 반주라도 해 봐야겠다 생각한 건 중 3때였어요. 그때는 어니언스의 곡들을 마스터한 일도 있어요. Q: 그 무렵 ‘녹음’같은 것들을 시험삼아, 즉 데모(demo)로 해본 일은 있었는지요? 그때는 카세트 레코더로 기타 치면서 노래 부르는 것을 녹음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같은 사람조차도 몇 번 해보았을 정도니까요(웃음) – 그때 집에 소니(Sony)제 카세트 녹음기가 두 대 있었어요. 크기가 큰 것이었어요. 그거 한 대에 녹음을 한 뒤 그걸 틀어놓고 다른 한 대로 다시 녹음을 하곤 했어요. 이런 식으로 두 번까지 녹음하면 그런대로 들을 만한 음질이 나왔어요. 그러니까 1차로 기타(어쿠스틱 기타) 반주하면서 멜로디를 녹음하고, 2차로 코러스를 넣거나 기타를 더빙하고, 더 추가할 게 있으면 3차로 한번 더 하곤 했죠. 그게 제 레코딩 경력의 시작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뒤에는 (조)동진 형이 가지고 있던 4트랙 레코더로 녹음을 해보기도 했죠. Q: 최성원 님의 기억에 의하면 뮤직 모노에서 조동익 님이 DJ를 하신 적도 있다고 하던데 맞나요?(맞겠죠?^^) 이대 앞에 파출소 쪽 횟집 있는 골목에 있던 곳으로 양병집 님이 운영하던… – 아~ 우리가 그곳의 새 이름을 지어줬잖아요. (양)병집 형이 하신 건데 그곳을 ‘뮤직 모노’라고 하지 말고 ‘뮤직 공사중’이라고 바꾸라고 우리가 투덜대곤 했어요. (양)병집 형이 내부를 고친다고 매일 공사를 했으니까요. 하하. 제가 스물 둘 정도였을 때인데 DJ로서도 막내였어요. 처음에는 “난 할줄 몰라요” 라고 얘기했었어요.. 그 당시 DJ라면 곡과 곡사이에 멘트도 할줄 알아야하고 “누구 누구씨 카운터에 전화와있어요” 라는 것까지 할줄 알아야 자격이 됐었거든요. 근데 성원형이그냥 음악만 틀면 된다는 말에 조금씩 마음이 끌리더군요. 어쨌거나 (최)성원이 형이 계속 추천을 해서 하게 되었죠. 그런데 그때 12만원인가 받게 됐어요. 당시로서는 큰 돈이었으니 무척 놀랐죠. 그 전에 고려대학교 앞에서 DJ를 한번 했는데 둘이서 7만원, 그러니까 1인당 3만 5천원을 받은 일이 있었어요. 그래서 뮤직 모노에서 제시한 액수를 딱 듣고 바로 “아.. 하겠습니다” 그랬죠. 하하하. Q: 조동익 님은 이른 바 ‘신촌파’는 아니시죠? 양병집, 유지연, 엄인호, 박동률, 김현식 같은 분들과 관련된 인맥은 아닌 것 같습니다. – 아니죠. (양)병집이 형을 만난 건 DJ로 픽업되고 난 다음이었어요., 그런데 사실 (양)병집이 형은 당시 유명한 사람이었잖아요. 거기에 ‘보스 룸’이라고 따로 있었어요. “앞으로 잘 좀 해보자. 내일부터 나와.”라고 하셨죠. 전 너무 좋았어요. 그 카페는 좀 이상한 공간이었어요. 그때 카페라는 건 나중에 압구정동, 방배동에 생긴 레스토랑을 말했는데, 뮤직 모노에는 레스토랑에 당연히 있어야 할 칸막이가 없었어요. 벽이 전부 회색이었고 굉장히 이상한(세련된) 공간이었죠. 놀라운 건 그뿐만이 아니었어요. 뒤쪽을 보면 조그만 무대를 만들어 놓았는데 거기다 톱밥을 채웠어요. 그리고 거의 전면이 유리였던 드럼 부스도 있었죠. 좋은 사운드를 만들겠다고 엄청나게 공을 들였던 거죠. 그리고 제일 왼쪽에는 턴테이블 2개가 있었어요. 제가 거기에 몇 장 되지는 않았지만 제가 가진 판을 거의 다 가져다 놓았죠. 그곳에서 제가 (한)영애 누나를 처음 봤고, 그 다음에 (전)인권이 형 처음 봤어요. 한상원 씨도 그때 만났어요. Q: 그때 양병집 님은 동서남북의 음반을 제작한 때라고 알고 있는데, 동서남북 멤버인 김광민 님과도 알고 지내셨나요? 연배가 비슷한 것 같은데… – (김)광민이는 어렸을 때부터 동네 친구였어요. 바로 옆집 살았고 ‘탁아소 동기’였어요. 어렸을 때 그 녀석하고 무척 많이 싸웠죠. Q: 그때 동서남북은 ‘국풍 81’같은 행사에 나가고 방송에서도 가끔 모습을 비췄습니다. 이런 일과 관련해서 무슨 에피소드가 없었나요? – 그때 또 일화가 있어요. 그 때 다들 술 좋아해서 매일 밤새도록 술을 마시곤 했어요. 그러다가 한 TV 방송에 나갔는데, 그 프로그램이 라이브로 연주할 수 있는 방송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양)병집이 형이 동서남북의 반주 테이프를 준비해야 했죠. 그래서 동서남북 멤버들이 기타 들고, 베이스 들고 서 있는 상태에서 반주 테이프를 틀었는데, 글쎄 그 테이프에서 다른 음악이 나왔다고 하잖아요. 이미자 씨 음악이 나왔다나요. (일동 웃음) 그 친구들이 웃기려고 하는 얘기인지는 모르겠는데… 그 음반이 서라벌 레코드에서 발매되었는데 서라벌 레코드사의 테이프 라이브러리에서 동서남북 걸 챙겨 와야 하는데 잘못 챙겨 온 거에요. (양)병집이 형의 성격도 있었지만 시력이 너무 나빠서 다른 테이프를 가지고 나온 거였어요. 그래서 방송하다가 난리났었다고 하더군요. 하하. Q: 뮤직 모노에서 DJ를 할 때 음악 깨나 듣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어떤 음악이 특히 유행했었나요? – 유행이라기보다 그 동네 분위기, 주변에 음악 듣는 친구들은 팝으로는 배리 매닐로우(Barry Manilow)를 좋아했고, 래리 칼튼(Larry Carlton)같은 음악도 많이 들었고, 가끔은 그 목록에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 같은 음악도 끼어 있었죠. 제가 많이 틀었죠. [우리노래전시회](1984)부터 [어떤날 1](1986)까지 Q: 조동익님의 첫 작품은 조동진 님의 2집(1980)에 조동익 님의 “어떤 날”이라는 곡으로 보입니다. 조동진 님의 3집(1985)에도 “얘야 작은 아이야”라는 곡이 실렸고… – 그게 첫 작품일 겁니다. “어떤 날”은 허영자 시인의 시에 멜로디를 붙인 곡이었어요. 곡을 만들고 나서 가사를 사용해도 되느냐는 허락은 나중에 받았죠. Q: 최초의 레코딩은 20대 중반 무렵인 1984년 [우리노래 전시회]에 실린 “너무 아쉬워 하지마”란 곡으로 알고 있는데 맞나요? 여기 참여하게 된 동기도 설명해 주시죠. – 사실 [우리노래 전시회 1] 참여하기 몇 해 전부터 본격적으로 음악을 하기로 결심을 하고, 고 3 때 쯤부터 작곡을 시작했어요. 친구들한테는 들려주었지만, 뮤지션들한테는 여러 가지 사정상 못 들려줬죠. 물론 마음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해요. 어느 날 내가 집에 없을 때 (조)동진이 형, (최)성원이 형이 제가 만든 노래를 듣고는 [우리노래 전시회 1]에 참여하라고 권했습니다. Q: [우리노래 전시회]에는 “너무 아쉬워 하지 마”도 실렸지만 양병집 님이 조동익 님의 곡인 “이 세상 사람이”를 부른 것이 이색적이었습니다. 이 곡은 이듬해인 1985년 양병집 님의 음반 [넋두리 II]에도 수록되었습니다. – 그것도 제가 처음에 작곡한 곡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양)병집이 형이 (제 곡을 듣고) 노래를 해 보겠다고 해서 그렇게 된 것이죠. Q: 이 음반은 광화문 랩 스튜디오에서 하셨죠? ‘서라벌 스튜디오’라고 불렀던 곳인데… – 예. 스투더제(製) 8트랙 녹음으로 했어요. 장비는 좋지 않았지만 작업하기는 좋았던 스튜디오였다고 기억합니다. 스튜디오라고는 처음 들어가 본 곳이기도 했고… Q: 이후 본격적으로 음악계에 투신하게 됩니다. 이때 특별히 어울리게 된 사람이 있다면 누구였는지요? – (최)성원이 형이나 (전)인권이 형은 이전부터 안면이 있었고, [우리노래전시회]에 곡을 실으면서 하덕규 형 등 거기 참여한 다른 사람들을 알게 되었죠. 그러니까 그때까지는 뮤지션이란 게 동경의 대상이었는데 그제서야 나도 ‘음악 합네’하면서 다른 뮤지션들과 한데 끼이게 되었던 겁니다. Q: [우리노래전시회]에 어떤날이라는 이름으로 참여했습니다. 이때 이미 실체가 있었던 것인가요? – 피아노를 연주하던 친구(최진영)가 있었는데, 자기 친구 중에서 기타 잘 치는 친구가 있으니 한번 만나 보라고 권해서 이병우를 만나게 되었어요. 만나서 얘기 좀 하고 술 마시고 하다가 같이 음악 하자고 의기투합했죠. 하루는 우리 집, 하루는 (이)병우 집에서 만나 음악을 만들고… 1985년 초 쯤 만나서 1년 정도 있다가 1986년 어떤날의 데뷔 음반을 낸 거죠. Q: [우리노래전시회](1984)와 [어떤날 1](1986) 사이에 조동익 님은 ‘베이시스트’가 됩니다. [우리노래전시회] 무렵에는 기타를 쳤는데 베이스 기타로 전향(?)한 과정은 어떤 것이었나요? – 그전에 혼자 곡 쓸 수 있는 정도로 기타를 쳤었는데, 이병우를 만나면서 베이스를 치게 됐어요. 이병우가 워낙 기타를 잘 치니까. 그래도 한 파트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떤날 I]은 엉성하지만 거의 둘이서 다 해결했죠. 베이스 연주에 있어서 자신이 없다는 마음도 생기는 게, 누구 앞에서 연주자라고는 못하겠어요. 곡을 쓰고, 편곡하면서 내가 하는 작업에 베이스를 친 정도라고 할까요. Q: 조동익하면 ‘프렛 없는 베이스’, 이른바 ‘프레틀리스 베이스’ 이야기를 빼먹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 악기를 언제부터 어떤 동기로 사용하게 되었는지 말해 주십시오. – 프레틀리스 기타에서 최고, 최초란 말 들으면 정말 몸둘 바를 모르겠어요. 이태원에서 자코 파스토리우스(Jaco Pastorius)가 라이브로 연주하는 장면을 LD로 틀어주는 것을 본 적이 있어요. 그때 제가 참 좋아하는 뮤지션이었죠. 자기가 악기를 만든 작업 공정을 자세히 밝힌 글을 어떻게 구했어요. 그걸 읽고 난 뒤 베이스 기타에서 프렛을 뜯어내고, 폴리에폭시 강력 접착제로 메꾸고, 사포질을 해서 만든 거였죠. 남들은 한창 연주력을 향상시키려고 연습할 시기에 ‘뻬빠질’이나 하면서 겨우겨우 프렛없는 베이스 기타를 만들었어요. 그래서 ‘조공방’이라고 불렸죠. 하하. 이렇게 완성한 베이스 기타는 첼로나 현악기랑 비슷한데, 그보다 줄이랑 지판 사이의 거리가 가까우니까 줄이 지판에 닿아서 떨리는 효과가 있죠. 소리가 ‘어택(attack)’이 있어요. 그때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 씨가 같이 하자고 했어요. 함춘호 씨가 (일렉트릭) 기타, 저는 (프렛리스) 베이스. 그래서 시인과 촌장의 [푸른돛] 음반에 실린 “고양이”에서 드디어 프레틀리스 베이스 기타를 사용했죠. Q: 1986년에 발표된 어떤날 데뷔 음반은 무심코 ‘동아기획에서 나온 음반’이라고 착각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아니더군요. 음반의 제작과 녹음 과정에 대해 설명해 주십시오. 1집 음반 경우 드럼의 세션 연주자들이 정확히 나와 있지는 않는데 그 점도… – 1집은 들국화의 (최)성원이 형이 기획해 준 음반이고 최윤식이라는 분이 제작을 맡은 음반이죠. (최)성원이 형이 들국화 멤버이고 들국화가 동아기획이라는 이름을 알린 존재니까 그런 착각을 할 수도 있었겠죠. 녹음은 한국음반 스튜디오에서 했고, 그때로서는 시간을 많이 쓴 편이었지만 요즘처럼 r그렇게 많이 쓸 수는 없었죠. 한 서른 프로(1프로는 ‘3시간 30분’) 정도? 그리고 1집에서는 조용필의 밴드에 있던 안기승 형이 와서 드럼을 쳐 주고 드럼 머신도 좀 썼던 기억이 납니다. 적은 사람들이지만 어떤날의 음악을 지금도 아껴주는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행복한 거죠. Q: 어떤날의 음악에 대한 상세한 질문은 돼지갈비 먹으면서 물어보기 뭐하니까(웃음) 나중에 기회를 잡겠습니다. 한 가지만 물어보면 어떤날은 ‘라이브 공연’을 하지 않은 존재로 보입니다. – 공연을 한 적이 없었죠. (이)병우는 조금 다르지만 저는 앞으로도 그럴 것 같고… [우리 노래전시회 1] 할 때 동숭동 샘터 파랑새 극장에서 딱 한 번 공연을 해 보고 완벽하게 공연을 하는 게 장난이 아니다 싶었어요. 무대에서 멋있게 악도 쓰고, 공연의 주인공도 되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조용히 돌아와 생각하면 또 다른 공포가 그런 생각을 잠재우게 되죠. 아는 사람이면 몰라도 모르는 사람 많으면 무조건 가기 싫네요. 대중공포증, 무대 공포증, 뭐 일종의 그런 거겠죠?(웃음). 스튜디오라는 공간이 저의 체질에 맞는 것 같아요.(참고로 조동익은 1999년 12월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조동진의 콘서트에서 ‘무대’에 섰다). 편곡과 세션, 그 재미없는 나날들 그리고 가끔씩 보람있던 날들 Q: 어떤날 이후에는 본인의 음악활동보다는 다른 사람의 음반에 작곡, 편곡, 연주 등을 많이 한 것 같습니다. 이른바 ‘편곡’이나 ‘세션’을 많이 했는데요… – 한때는 무지 많이 했죠. 편곡 일을 하다 보니 내 음반에 신경 쓸 시간이 없었어요. 그러다 더 이상 못 참겠다고 생각되면 내 음반 작업을 몰아서 하기도 했었죠. 김현철, 함춘호와 함께 한 야샤같은 그룹도 그렇게 해서 결성된 것이기도 하죠. Q: 요즘은 편곡이라는 게 미디 작업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때는 편곡을 전부 악보로 그려 주셨나요? 꽤 수고로운 일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편곡에 관한 이론 공부를 따로 하신 적은 없었을 듯한데… – 공부를 따로 한 적은 없어요. 악보 그리는 건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인데 한창 할 때는 빨리 그렸어요. 그런데 사실 편곡이라는 게 악보를 그리냐 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더군요. 열심히 그려왔는데 막상 해보면 그게 전혀 소용이 없을 때가 있거든요. 그럴 경우는 괜히 그린 거죠. 반대로 대충 그려 왔지만 편곡자가 의도하는대로 금방금방 잘 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러니까 악보를 그려가는 것 보다 직접 얘기하는 것이 빨리 통한다면 그렇게 하는 편이 좋은 것이죠. = (조)동익 형은 악보 예쁘게 그리기로 유명해요. Q: 편곡을 하지 않아도 베이스의 세션을 맡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럴 때 음악적으로 어려웠던 점은? – 베이스를 쳐야 되는데 편곡자가 없는 경우가 많았어요. 기본 코드와 멜로디가 적힌 악보밖에 없을 때가 자주 있어서 제가 알아서 (베이스를) 연주해야 했죠. 말씀드렸듯이 제가 편곡을 맡았을 때는 악보를 다 그려갔죠. Q: “텅빈 마음”이 수록된 이승환의 데뷔 앨범에도 편곡을 맡은 것으로 나옵니다. 별 걸 다 하셨네요?(웃음). 앨범 표지를 보면 편곡자가 ‘유영선, 조동익’으로 나오는데 이런 경우는 편곡을 두 분의 공동작업으로 한 것인가요? – 하도 많이 해서 기억을 더듬어 봐야 되요(웃음). 그런데 편곡을 공동으로 하는 경우는 드물어요. 앨범에 실리는 곡을 나눠서 했기 때문에 (유영선 씨와) 서로 얼굴 마주칠 일은 없었어요. 그때 이승환 씨가 전화를 계속하더니 오태호랑 같이 찾아와서 부탁하길래 편곡을 맡게 되었어요. Q: 조동익 님이 다른 사람의 음반에 참여한 많은 음반들 가운데 김민기의 1993년 음반에 수록된 곡 “철망 앞에서”도 기억납니다. 조동익 님이 편곡을 맡고 장필순 님과 한동준 님이 노래에 참가하고… 여기 참여하게 된 경위는 어떤 것인가요? – (조)원익 형이 서울음반 문예부장으로 계실때, 원익 형으로부터 연락이 왔었어요. “민기가 너 좀 보잔다…” 그때도 역시 주변의 자주 만나는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면 저와 연락하기가 조금 힘들었나 봅니다. 이 점 늘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하하~ 그 앨범에 실린 곡들 중에.. 오래전에 만들어진 곡들은 대부분 민기형이 직접 편곡을 하신 걸로 기억합니다. 엉성한 편곡이 아닌 아주 치밀한 편곡.. 나일론 기타와 노래를 먼저 녹음을 하고 거기에 추가적으로 필요한 악기들이 조심스럽게 입혀졌죠. 물론 민기형님의 편곡대로… 민기형의 편곡악보를 보고 상당히 놀랬고 긴장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위의 곡들보단 나중에 만들어진 곡중에 “철망 앞에서”는 저에게, “봉우리”는 김광민에게 맡기신 거죠. “철망 앞에서”를 편곡을 해보라는 민기형 말씀에 얼마나 기뻤던지… 초등학교때 민기형 LP를 앞뒤로 수도없이 들으며 자켓사진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기억이 요즘도 납니다. Q: 이 음반(네 장짜리 음반)에 수록된 “봉우리”(앞서 말했듯 이 곡의 편곡은 김광민이 맡았는데, 김광민은 김민기가 음악 감독을 맡은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집(1984)에서도 김민기와 함께 편곡을 맡았다)는 [하나음악 옴니버스 2]에도 마지막 트랙으로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막연히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인데 조동익 님이 보기에 조동진 님과 김민기 님 사이의 관계는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 조동진 형과 김민기 형의 관계요? 글쎄요. 저와는 연배가 차이가 나는 분들 사이의 일은 제가 잘 알지는 못해요. 두 분이 서로의 일을 방해하는 사이는 아닐 거에요(웃음). Q: 요즘도 편곡이나 세션 일을 가끔씩 할 때가 있나요? – 요새는 진짜 거의 (스튜디오에) 가지 않죠. 1996-7년경인가부터 (편곡, 세션) 일이 없어요. 사실 어떤날의 음반으로 번 돈은 몇 푼 안 되고, 먹고 사는 일은 편곡으로 거의 돈을 벌었죠(웃음). 그때는 김광석, 안치환, 한동준, 장필순 등의 음반을 했었는데 이들의 음악은 내가 좋아하기도 해서 편곡 작업을 즐겁게 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울고 싶을 정도로 세션과 편곡 일을 하기 싫은 적도 있었어요.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떠밀려 갔던 것 같아요. 그래서 시간이 갈수록 편곡이란 일이 나한테 안 맞는다고 느끼게 되었어요. 능력의 한계도 느끼고 한순간에 너무 많은 양을 부탁하기 때문에 힘들었어요. 편곡 일에 너무 질리면서 맘에 안 드는 곡을 예쁘게, 멋있게 잘 해 보려고 하는 일이 싫어졌어요. 언젠가 그만 둬야겠다 고 생각해 오다 몇 년 전부터는 잘 하지 않게 되었죠, 물론 가까운 친구들, 동료들, 후배들 일은 하고 싶고, 하고 있고. 사실 편곡이나 세션보다는 직접 곡을 만들 때 음악하는 재미를 느끼게 되요. 그래서 그게 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Q: 조동익 님이 편곡과 세션을 많이 한 곳은 서울 스튜디오였습니다. 그곳의 대표인 최세영 씨는 어떤 분이신지요? – 서울 스튜디오에서 살다시피 한 적이 있었죠. 저는 어렸을 때 그 분 아버님(장충 스튜디오의 대표 최성락)에 관한 이야기부터 많이 들었었어요. 하지만 최세영 님을 개인적으로 잘 알지는 못해요, 같이 식사 해 본 적도 한번도 없고… 그냥 먼발치서 보기에 멋진 분이라고 생각했어요. 왜냐면 그때만 해도 사업가로써는 그걸 붙들고 있을 이유가 없는데도 붙들고 있었으니까. 본인이 너무 재미있고 좋아서 그 사업을 한 것이죠. 사실 그런 자리에서 스튜디오를 지어서 음악을 만들어 내서 생기는 이익보다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거기서 발생하는 건물 이자를 받는 게 더 크지 않겠어요? Q: 요즘은 서울 스튜디오의 위세가 많이 꺾인 것 같습니다. 다른 스튜디오의 장비나 시설이 좋아져서 그런 것인가요? 아니면… – 그게 아니라 스튜디오들이 일이 없어서 그렇죠. 일종의 공급과잉이고 음반 제작이 많이 줄어든 것 같아요. 요새는 데모 테이프를 찍은 후 스튜디오에서 녹음하는 경우가 별로 없으니까. 집에서 다 해서 오곤 하죠. Q: 서울 스튜디오는 본격적인 ‘멀티트랙 레코딩’을 시작한 곳으로 알고 있습니다. 녹음 할 때 ‘합주’를 하지 않고 드럼 따로, 베이스 따로 하게 되었는데 대략 그 시기가 언제쯤부터라고 볼 수 있어요? – 그건 제가 녹음을 맡기 전부터 가능했죠. 하지만 그때도 드럼, 베이스, 기타 등 각 악기가 따로따로 하지는 않았어요. . = 그러니까 드럼, 베이스, 기타, 건반까지 네 사람이 밴드 구성으로 우선 호흡을 맞춰 합주하고, 나중에 나머지 것들을 더빙하는 방식으로 변화하는 시기를 거쳤죠. – 그러다가 요즘은 변태스러운 요구를 하는 녹음 방식이 생겼어요. 어떤 때 스튜디오에 불려 가면 특이한 녹음 방식으로 하더라구요. 그게 음악적인 내용 면에도 좋은 것도 아니고 돈을 절감하는 것도 아닌데도 이상한 방법들을 쓰더라구요. 예를 들면 한 사람이 미리 미디로 다 찍어 놉니다. 거기에 나만 불러서 베이스를 녹음하게 해요. 그 이전에 찍어둔 반주를 쓸 거냐고 물으면 그건 또 아니래요. 그럼 제가 어떤 방식으로 연주를 하겠죠. 그런데 하다 보면 다시 다른 누구를 불러야 되겠죠. 그렇게 한 사람씩 불러다가 연주하면 굉장히 능률적일 거라는 생각을 하더라구요, 어떤 연주는 전혀 쓸 수도 없게 되는데 말이에요. 그 사람들(음반제작자들)은 나름대로 연구를 한 건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한다고 녹음이 잘 되는 게 아닌데도 이상한 방법을 택하더군요. 제법 녹음을 많이 했던 사람들인데도… = 다시 말하면 가령 한 앨범에 열 곡을 넣으면, 베이스를 불러서 열 곡 다 치게 하고, 그 다음에 기타를 불러서 또 다 치게 하는 식이에요. 그쪽 생각은 악기 여러 개를 동시에 녹음하는 것 보다 한 악기를 한꺼번에 녹음하는 게 좋다는 생각인가봐요. 뭐 혹시 한 악기에 연주자가 신경을 집중해서 쓸 수 있다는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일단 연주하는 사람이 자기가 뭘 하는 건지도 모르면서 그냥 맹숭맹숭 연주하는 거에요. 그래서 연주하다가 “괜찮아요?” 물으면 “좋아요”라고 그래요, 그러면 계속 하다가 가는 것이죠. 그 다음에 올 누군가도 역시 “이건 왜 이래요? 여기다 맞춰요, 저기다 맞춰요?” 묻게 되죠. 계속 그런 과정을 반복하는 거에요. “이걸 들어보시고 여기다 맞춰 주세요”라고 말하고 문제가 있는 걸 수정하는 게 좋은데 이상하게 요즘은 (연주인을) 한 사람씩 부르는 경우가 많더라구요. ‘영화음악’ 작업에 대한 뒷이야기들 Q: 요즘 음악계의 상황에 대해서는 계속 이야기하면 스트레스만 받으니까 이 정도로 하죠. 그런데 ‘가수 음반’이 아닌 레코딩은 어떤가요? 특히 조동익 님은 영화음악 작업을 많이 했는데, 이건 가수 음반과는 좀 다를 것 같습니다. 먼저 영화음악을 맡은 계기부터 설명해 주시죠. – 김홍준 감독에게 어떤 사람이 나를 추천했어요. 당시 하나음악 최순식 실장도 연결해줬고. 처음 하는 일이니까 당연히 낯설고 걱정됐죠. 영화음악은 일반 스튜디오 녹음이나 개인의 음반을 내는 것이나 세션하는 것과는 또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어요. 영화음악은 영화에 깔리는 음악이고, 틀에 얽매일 거라 걱정했는데, 평소에 못 해본 음악을 할 수 있었어요. 개인 음반은 아무래도 히트를 쳐야 한다든가 대중들에게 쉽게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작업해야 했는데, 영화음악은 그런 면에서는 자유롭죠. 많이 팔리고, 알려지고, 돈도 벌고 하고 싶은 마음이야 물론 있는데(웃음), 다른 사람들과 비교한다면 내 욕심이 다른 데 많아서…. (웃음) Q: [장미빛 인생], [넘버 3], [내 마음의 풍금] 등의 영화음악을 하셨는데 각각 어떤 작업을 거쳤고, 또 조동익 님의 생각과 일치하는 결과물이 나왔는지… – [장미빛 인생], [넘버 3]는 음악을 앞세울 필요가 없었는지, 어땠는지 성에 안 차게 나왔어요. 영화의 상황 때문인지 내가 길게 만든 것은 확 들어 내고, 볼륨이 컸으면 했던 것들은 낮게 깔리고… [넘버 3] 같은 경우 영화가 깡패들 치고 받고 싸우는 내용이고 배경이 도시이기도 하니까 전자음악풍으로 작업했죠. 편곡일을 많이 할 때 시퀀서 사용하고 프로그래밍을 많이 사용했는데 그 뒤 다 처분했어요 그래서 [넘버 3] 할 때는 박용준의 도움을 많이 받았죠. 시퀀싱과 프로그래밍 작업은 박용준이 거의 다 했어요. [장미빛 인생]은 ‘예쁜’ 영화는 아니지만 음악도 영화처럼 강하거나 거칠게 가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악기들을 많이 사용하지 않고 피아노 하나만 가지고 하겠다는 생각이었어요. 2-3곡 정도는 타악기랑 드럼을 썼죠. Q: 아무래도 [내 마음의 풍금]이 조동익 님의 음악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같습니다. 영화음악 작업은 언제 어떻게 제안을 받았고, 시나리오에서 어떤 분위기의 컨셉으로 음악을 구상했는지… – 1998년 10-11월 무렵 추천을 받았어요. 대본을 읽어본 몇 사람이 나랑 하는 게 맞을 거란 얘기를 했다고 들었어요. 서현석 대표는, 처음 음악 시작할 때부터 잘 알던 형이었죠. 다른 대본과 달랐고, 영화로 만들어져도 다른 것들과 분위기가 차별화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보기 드문 영화여서 괜찮을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음악을 완성하고 나서는 또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장미빛 인생]이나 [넘버 3]와는 다르게 [내 마음의 풍금]은 그래서 음악이 ‘들리는’ 영화로 기획했어요. “홍연의 테마”, “은희의 테마”라든가, “산리마을의 아이들”이라든가, “불의 테마”, “비의 테마” 등이 실렸죠. 그걸 짧게 변주하기도 하고. 결과적으로 향수를 불러 일으킬 수 있는, 굉장히 단순하고 멜로디 위주의 음악으로 구성했어요. Q: 조금 구체적으로 기악편성이나 편곡을 어떻게 했는지요? – 절반 정도는 현악, 클래식 기타, 어쿠스틱 기타, 피아노를, 그리고 부수적으로 타악기, 실로폰을 쓰기도 했어요. 실내악 분위기도 내보려고 4인이 연주하기도 했어요. “홍연의 테마” 다른 버전에서는 좀더 여러 명이 하는 효과를 내 보려고 했죠. 열 몇 명 정도에 그쳤지만… 걸린 시간은 음악 작업만 2달 정도? 대본 받았을 때부터 조금씩 해 보고 머리 속으로 그려보다가 피아노 하나만 가지고 데모 레코딩을 해 보기도 했죠. 그리고 그해 1월에 스튜디오에 와서 한 달 좀 안 되게 작업했죠. “홍연의 테마” 노래 버전은 제가 작곡한 음악이에요. LP 판을 트는 장면에 쓰였던 1960년대 초 팝인데 1960-63년 무렵의 팝 음악으로 선곡했어요. 패티 페이지의 “I Went to Your Wedding”, 코니 프란시스, 마크 다이닝, “Scarlet Ribbon” 등. Q: 영화음악을 하게 될 때는 어떤 기준으로 선택하게 되었는지요? – 음악을 맡기고 싶다며 시나리오 봐 달라고 하면 제가 그걸 보고 나서 결정했어요. 대본을 보고 느낌에 따라 결정하죠. 물론 대본과 영화는 차이는 있어요. 대본을 봤을 때는 재미있을 것 같고 그래서 그런 것도 해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시작하죠. 송능한 감독과는 당시 나온 [트레인스포팅]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는데 그런 분위기로 음악을 풀어야겠다 생각했어요. 복고풍인 한편 모던한 음악으로… Q: 영화음악 작업 과정은 대체로 어떤 절차를 거치는 아직 잘 감이 서지 않습니다. 설명을… – 대본을 보고 간단하게 프레이즈를 써 놓고, 러시 필름을 보면서 그걸 발전시킵니다. 데모를 떠서 그림이랑 맞춰 보고 정리해서 편곡하고, 본 녹음에 들어가죠. 예전에는 정확하고, 박자도 딱딱 맞아야 하고, 깔끔하고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나중에는 그런 면에서는 마음이 많이 편해졌죠. 어떤 형태로든 음악적이면 되겠죠. 그리고 영화 현장에도 나가 보게 되는데 [내 마음의 풍금]은 촬영지가 전라북도 고창이라서 1번 밖에 가 보았지만, [장미빛 인생]은 몇 번 가 보았어요. [넘버 3]도 1-2번 가 보았고. 감독들이 가능하면 현장에 나와주길 바라더라고요. 실제로 도움도 되죠. Q: 영화음악 작업과 개인의 음악 작업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 음악 이전에 영화가 있기 때문에 영화를 만드는 사람의 입장과 내가 영화에 대해 해석한 것이 다를 때가 있어요. 영화는 세 편 다 좋았어요. [내마음의 풍금]은 앞의 세 편보다 시간적인 면에서 여유가 있었죠. 편집, 더빙, 믹싱을 라이브톤(영화 후반 작업하는 회사)에서 했으니까요. [넘버 3]는 영진공에서 음악을 더빙했는데, 밤 꼴딱 새고 양수리까지 가서 기다리다가 했어요. Q: 좋아하거나 기억에 남는 영화음악이나 영화음악가가 있다면. – [쉰들러 리스트]의 음악. 존 윌리엄스, 엔니오 모리코네, [블루]의 즈비그뉴 프라이즈너 등. 한 사람을 미친 듯이 좋아하면 흉내내게 될까봐 편식은 하지 않으려고 했죠. Q: 영화 음악을 하는 게 음악인의 생계에 도움이 되나요? – 저의 영화음악 경력은 아직 얼마 달라 해서 얼마 받을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죠. 제 경우엔 운영을 잘못해서인지 생계에 도움이 안되던데요…(웃음) Q: 영화음악 음반을 냈을 때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는지요. – [무비] 이후 영화에 삽입된 음악 말고 내가 만든 음악만 들어있는 음반을 만드려고 했어요. 그런데 영화음악 음반을 만드는 것도 힘들어요. 작업이 두 배 정도 되죠. 외국의 O.S.T. 처럼 장면에 쓰인 음악 그대로 넣는 거라면 몰라도, 뭔가 다른 식으로 하려고 하면 장사가 되지 않는다고 음반사측에서 좋아하지를 않아요. 영화에 넣은 곡도 음반에 넣을 수 있게 길이도 충분하게, 그리고 사람들이 음악만 들어도 만족하게 다시 만들어야 하니까 2배의 작업이 되죠. 하나 음악의 ‘무거운 짐’을 지고 그렇지만 꿋꿋하게 Q: 이제 하나음악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재정적으로 어렵다고는 하지만 하나음악은 후배들을 발굴해서 음악적 맥을 이어오는 데는 성공한 것 같습니다. ‘후진 양성’은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가요? – 알아서 찾아온 것이고 특별히 양성이라고 말할 건 없는데요. 단, 논현동 스튜디오가 있을 때 같이 연주하는 친구들 몇몇이 같이 이야기하는 자리를 만든 적은 있어요. 정식 음악학원 하기에는 여러 가지로 여건이 되지 않지만 관심 있어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 사람들을 위해서 1주일에 1번씩이라도 실제 악기의 연주에 대한 것, 레코딩하는 과정 등을 같이 해 보자고 해서 한 적이 있었죠. 하지만 논현동 스튜디오를 떠나면서부터는 제대로 못하고 있죠. Q: 하나음악의 스튜디오 문제는 계속 난항에 처해 있는 것 같습니다. = 그렇다고 그 문제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건 아니에요. 일단 몇 군데 알아 보기도 했지만 여러 가지 사정상 마땅치 않았어요. Q: 그러면 작년에 나온 장필순의 [Soony 6]와 이번에 곧 나올 ‘옴니버스 음반’ [꿈]은 스튜디오가 없는 상태에서 녹음을 어떤 식으로 진행했는지요? – 대부분의 트랙은 논현동 스튜디오 이후 잠시 거처로 삼았던 던 합정동 스튜디오 시절에 만들어 놓은 것들이에요. 그걸 컴퓨터로 모두 받아서 하드 디스크 레코딩 방식으로 작업한 것이죠. 그때 만들어 놓지 않은 곡들은 홈 레코딩으로 한 것이죠. 드럼의 경우 많은 곡들을 미디로 찍어서 만들었고… 더 버드의 “꿈”, 도연·현정 “Daydream)” (이)성렬의 “Color”만이 생드럼 녹음이에요. Q: 하드 디스크 레코딩을 많이 한 것에는 특별한 미학적 이유가 있었던 건지요? – 하드 디스크 레코딩을 하고 있는 것은 다른 방법이 없어서 그런 거에요. 이상적인 것은 하드 디스크 레코딩도 하고 옆에는 멀티트랙 레코더도 있어서 ‘이 부분은 하드 디스크 레코딩으로 하고, 저 부분은 멀티트랙 레코딩으로 하는 것이겠죠. 없으니까 괜히 아쉬워지는 건지 모르겠지만, 하드 디스크 레코딩을 하다 보니까 ‘이런 부분은 좀 따뜻하게 만들고 싶은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Q: 집에서 하드 디스크 레코딩으로 작업한다면 ‘몇 프로를 사용했다’는 개념은 없는 거겠죠? – 그렇죠. 그런데 녹음 시간보다도 믹싱하는 시간이 오래 걸리죠. Q: 그런데 아무래도 하드 디스크 레코딩을 하다 보니까 음악이 전체적으로 ‘일렉트로닉’해지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전과는 달리 하나음악에서 나온 음악들이 ‘가사’가 명확하게 들리지 않는 것도 이 점과 무관하지 않아 보입니다. [Sooney 6]의 경우 장필순 님의 보컬은 소리로서는 예쁜데 가사는 명확하지 않게 들리는 듯해요.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달라진 녹음 환경에서 의도한 면도 있는 것인가요? – 그럼요. 하지만 그런 점을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 설명하기는 좀 어려운데요, 가령 크게도 해보고 작게도 해봤을 거라는 생각이 들고… ‘이게 제일 좋다’고 해서 그 중에 고른 것일 텐데요. 그런데 그게 바깥으로 나가면 ‘목소리가 작다’, ‘가사가 안 들린다’는 식의 말이 나오게 되죠. 어떨 땐 ‘목소리가 크다’고도 하던데… 그런데 내가 어떤 노래를 들었을 때 가사가 들리든 안 들리든, 처음에 딱 들었을 때 그 음악이 싫으면, 그 이전에 가사가 안 들리는 것 여부와 관계없이 그냥 싫은 거고, 어떤 음악이 ‘가사가 왜 안 들리나’, ‘신경질 난다’고 느끼면 내가 그 음악에 관심이 있다는 거고, 그때부터 그 음악의 가사가 뭔지 찾는 거죠. = (조)동진 님은 이번 앨범에서 장필순의 보컬이 작다고 하셨죠. 보통 그때 어른들은 작다고 그러시죠. 음악에 대한 인식이 달라서 그렇게 다가오는 것 같아요. Q: [Soony 6]의 경우 독집 앨범이지만 [꿈] 같은 경우는 여러 명이 참여한 음반이니까 편곡이나 프로듀싱이 또 달랐을 것 같습니다. 이전의 [하나음악 옴니버스]나 [뉴 페이스], 그리고 [바다]에 비해서 어떤 차이가 있었나요? = 개인이 하죠. 다른 곳의 시스템은 모르겠지만, 하나음악 안에서는 각자 알아서 실력을 떠나서 자기가 표현하고 싶은 기본적인 것, 꼭 필요한 것을 다 해 오죠. 예를 들어서 미디 작업하는 해오는 친구들은 거기에서 필요한 기본적인 작업을 다 해 오고. 그래서 [꿈] 같은 경우엔 거의 완성을 해온 것을 컴퓨터에 옮기고 난 후, (조)동익 형이 믹스하면서 필요한 건 넣어주고 뺄 거는 빼면서 정리하는 식이었어요. 기본적인 작업은 개인이 하고 그걸 가지고 와서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그런 것을 선배들이 옆에서 좀 도와주는 식이죠. Q: 이전하고 차이가 있다면 혹시 이런 점일까요? 미리 악보로 ‘어레인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작업해온 것을 듣고 나중에 수정하고… = (조)동익이 형은 자기가 미리 손을 대서 시작하고 싶어하지 않고 ‘너희들의 색깔을 먼저 보자’고 하죠. 그렇게 보고 나서 해온 것에 맞게 도와주죠. [꿈]의 트랙에 일일이 이름을 넣지는 않았지만 (조)동익이 형이 편곡했다고 할 수 있는 곡들이 많아요. 일단 해온 것을 본 다음에 도와주는데 그런 게 편곡인 것이겠죠. Q: 이번 음반에도 조동진 님 이름이 프로듀서로 들어가 있는데 (조)동진 님의 역할을 어떤 것인가요? = (조)동진 님은 이른바 ‘이그제큐티브 프로듀서(executive producer)’이고, 실질적인 사운드 프로듀서 에는 (조)동익이 형 이름이 들어가야 되겠죠. 그런데 (조)동익 형이 이름 넣는 것을 거부하죠(웃음). [바다] 같은 경우와 달리 [꿈] 같은 경우에 프로듀서 이름에 (조)동익 형 이름이 들어가지 않앗는데 실질적으로 전체적인 그림을 그린 것은 (조)동익이 형이죠. Q: 이런 ‘옴니버스 음반’ 혹은 ‘컴필레이션 음반’에서 일관성을 확보하는데 어려움이 있다면 무엇인지요? [꿈] 같은 경우 이질적인 트랙들이 많은데… = 엄청 다양하기는 하죠. 하나음악이 사실은 일반인들이 보기에 한 색깔인 것처럼 느낄지 모르겠지만 실질적으로 굉장히 다양하죠. [바다]는 좀 곡들이 서로 비슷할지 모르겠는데 [꿈]은 음악 스타일이 서로 다 달라요. 각각 본인들의 색깔이 다양하게 나왔어요. 굳이 비교하자면 전에 나온 [뉴 페이스]와 비슷한 느낌이랄까… 하지만 음반은 하나인데 전체적인 색깔이 너무 다르면 안되니까 일관된 흐름을 가지게 하죠. 색깔이라는 것은 개인의 차이인데, 그건 실력보다는 마인드의 문제이기 때문예요. 사람들이 ‘하나음악이 무슨 재즈 음악을 하느냐’고 그럴지도 모르지만 저희 내부에서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Q: 그렇게 다양한 트랙들의 순서를 배치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어떤 원칙이 있었나요? = 타이틀을 연주곡으로 하자는 의견도 있었고, 음악 스타일과 무관하게 흐름으로 잡아서 배치하자는 의견도 있었고, 여러 의견이 있었어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로 연주곡을 배치하려고도 했는데 연주곡이 길기도 하고 그렇게 가벼운 곡들이 아니니까 그렇게 하기도 어려웠죠. 결과적으로는 록 스타일은 록 스타일대로, 연주곡은 연주곡대로 모았죠. 연주곡은 마지막에 모아서 배치해서 버드, 이성렬, 박용준의 곡을 8번, 9번, 10번 트랙에 넣었죠 사실 원래는 버드의 연주곡이 4번이었죠. = 곡 순서를 장르별로 묶은 것은 이런 면도 있어요. 음악 듣는 사람이 첫 번째 곡으로 시작해서 마지막까지 듣는 건 아니잖아요. 음악 듣는 사람이 자기는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는데 억지로 별로 듣지 않는 음악들을 듣게 하지는 말자고 판단했죠. 매스컴처럼 맘에 들지 않는데도 하도 많이 들으면 자신도 모르게 따라오게 하는 건 거부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장르별로 딱딱 묶자고 했죠. Q: 이번에 [꿈]에 참여한 사람들은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한 이름도 있을 겁니다. 그래서 여기 오신 분들각자에게 몇 마디 묶겠습니다. 먼저 [꿈]에서 ‘미는 곡’인 “작은 새 나비 벌레 파리”를 수록한 이다오 님께 물어보겠습니다. 예전에 델리 스파이스의 김민규가 운영하는 문라이즈 레이블에서 나온 옴니버스 음반에서도 “등대지기”를 발표한 것으로 아는데… – 예, 저는 원래 하나음악 소속이었지만 그때 (이)한철의 소개로 참여했어요. 그때도 각자 알아서 집에서 녹음한 곡이었어요. (김)민규 형이 프로듀서 역할을 하기는 했지만 많이 개입한 것은 아니고… 문라이즈는 (김)민규 형이 델리 스파이스 활동으로 바빠지면서 활동이 뜸해졌어요. 지금은 하나음악에서 독집을 준비하고 있어요. Q: 이 자리에는 없지만 이미 독집을 발표한 오소영 씨는 하나음악에서 가장 ‘어쿠스틱’한 음악을 하는 것 같습니다. 맞나요? = 그런데 (오)소영이의 전공은 컴퓨터 공학이에요. 물론 컴퓨터를 잘 알고 그에 대한 감각이 있는 것과 전공이 꼭 상관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오)소영이는 그런 감각이 있어요. 우리 내에서 (오)소영이의 감각과 이해력을 쫓아 갈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심지어 게임같은 걸 해도 보통 사람들 보다 훨씬 빠르게 이해해요. 음악은 컴퓨터 전혀 못 할 것 같은 스타일로도 보이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다르죠. 컴퓨터라는 게 딱딱해 보이는데 (오)소영이 음악은 정말 정서적이죠. 우리가 보기에 (오)소영이는 그냥 덤벼드는 스타일이고 (이)다오는 매뉴얼을 다 꼼꼼히 분석하는 스타일이에요. 컴퓨터 뿐만 아니라 어떤 것이든지 그렇더라구요. (이)다오는 남의 매뉴얼까지 하나하나 짚어 보더군요. Q: 이번에 버드로 참여한 김정렬 씨는 재즈에 조예가 깊어 보입니다. – (조)동익형과 처음 만났을 때는 새바람이 오는 그늘에서 활동을 하고 있었어요. 고등학교 다닐 때 어떤날을 정말 좋아했었는데 누군가 ‘저 사람이 (조)동익이야”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보니까 배추장사같이 생긴 시커먼 사람이 있더라구요. 정말 실망했어요, 하하. [바다]에는 솔로로 참여했고, 이번 [꿈]에는 더 버드로 참여했는데 더 버드는 5인조로 구성된 재즈 밴드예요. 그렇다고 연주는 별로 하지 않아요. 한 달에 하루 정도 홍대앞의 클럽에서 연주하는 정도이고, 이번 달에 녹음을 진행하려고 해요. 음악을 어떻게 보급할 것인가 Q: 제가 걱정한다고 뾰족한 수는 없지만 음반을 어떻게 배급할 것인지 걱정스러운 면이 있습니다. 음반시장이 워낙 얼어붙어서… = 인터넷 음반 숍 몇 군데하고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하고, 나머지는 저희 사이트에서 소화하려고 해요. 저희가 직접 포장도 할 거에요. 도매상을 통하는 오프라인 유통은 하지 않으려고 해요. Q: 저는 지켜보는 사람이지만 여기 계신 분들은 걱정이 많을 것 같습니다. 음악이 좋지 않아서 잘 팔리지 않는 것은 그럴 법도 한데 음악이 좋아도 팔리지 않으니까… . = 실제로 음악에 몸 담고 있는 사람들은 사실 걱정 안 해요. 그걸 걱정하기 시작하면 속된 말로 삐딱선도 타게 되겠죠. 사실 좀 걱정이 되지만 근본적인 걱정을 안 하니까 아마 음악을 계속 할 있는 게 아닐까요. 좀 걱정되기 시작해서 불안해지면, 또 뭔가 방법을 찾게 되는 거 같아요. 왜냐면 그게 생활인 사람들이니까요. 음악을 하면서 부업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정말 자신이 좋아하는 걸 하고 있는 거니까요. Q: 음반시장이 얼어붙은 것에 대해 음반업계 관계자들은 ‘mp3의 불법 다운로드’라고 지적하는 것 같습니다. 합법적으로 다운로드를 유료화시킨다는 말도 있고… 하나음악 식구들은 mp3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 그런데 유료화를 해도 워낙 피해가는 길들이 너무 많기도 하고 크게 음반 시장에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요. Q: 음악을 직접 하는 분들이 mp3를 많이 이용하는 것도 본 적이 있습니다. 하나음악 식구들의 경우는 어떤지요? 이 점 포함해서 mp3에 대한 각자의 견해가 궁금합니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각자의 견해를 듣기 위해 질문자는 개입을 자제했다) = 그렇지는 않아요. 우리 중에서는 mp3를 몇 곡 다운로드받아서 들어본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저희가 듣고 싶은 음악은 구입해서 들어요. 그리고 외국 음반 경우는 인터넷에서 찾아서 구입하고. – 그런데 옛날에도 빽판이라는 게 있었고 아주 중요한 문화였죠. 저도 핑크 플로이드의 음반을 빽판으로 사서 들었어요. 하지만 나중에는 원판으로 다시 다 샀어요. 그런데 저같은 경우는 극소수겠죠. = 나 같은 경우에는 핑크 플로이드를 테이프로 녹음해서 다 들었거든요. – 사실 그런 사람이 더 많았겠죠. 요즘 음악들은 다 하나의 파일 개념이니까, 마음에 안 들면 지워버리고 마음에 들면 복사해서 누구 주고… 그런 개념이죠. = 그런데 사실은 mp3를 다운 받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일반 대중들의 인식의 변화가 필요한 거고, 그런 문화가 필요한 거지, 굳이 그걸 법에서 막고 안 막고 하는 문제는 아니에요. 이건 어쩌면 문화적 인식의 차이일 거에요. 하다못해 mp3를 듣더라도 그걸 찾아 들을 수 있는 노력을 기울이는 만큼의 애정과 인식이 필요한 거죠. 사실 mp3 때문에 음반사 입장이 어떻게 된다는 건 메이저 음반사들에나 해당되는 얘기고 (작은 음반사에는) 커다란 영향은 없죠. 또 그렇게 한다고 해서 대한민국의 문화적인 척도가 높아지는 건 아니겠죠. 사실 지금 대한민국의 문화적인 기반이 너무 약해서요. = 그런데 저는 음악을 mp3로 듣지 않는데 CD 음질과 비슷한가요? = 좋은 시스템에서 들으면 많이 떨어지고 일반 PC용 스피커로 들으면 별 차이 안 나죠. 그러니 mp3로 다운로드받아서 듣는 것은 음악을 제대로 듣는 것은 아니죠. 옛날에 아주 작은 라디오로 음악을 들을 때 와 비슷한 것이죠. 제대로 된 오디오 시스템을 갖추고 듣는 것과 천양지차인데 그게 전부인 줄 알았잖아요. = 제 경우는 mp3로 음악을 들으면 화가 날 때가 있어요. 소리의 원래 느낌이 사라져요. 그런데 내 생각에는 ‘애초에 그 음악을 만든 사람이 어떤 걸 생각을 했느냐’도 중요한 판단 기준일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냥 아무 것도 모르고 했는데 우연히 음질이 좋게 되었다면 그건 할말이 없지만, 그렇지 않고 미리 계산해서 mp3에 맞게 만든 음악이라면 그건 mp3를 듣는 게 더 좋을 수도 있죠. = 어쨌든 시중에 mp3가 얼마나 있던 간에 음악을 찾아 듣는 친구들은 별로 없는 거 같아요. 문제는 그런 친구들이 아직 음반 시장에 많지 않다는 거죠. 많아져야 되는데 더 줄어들고 있고, 그리고 음악은 찾아 듣고 관심을 가진 분들이 줄어들고. 공연할 때도 가서 보면 좋은 노래는 별로 없는 거 같아요. 요새는 공연장에 가도 소리에 민감한 사람은 많지 않아요. = 공연 보러 가는 건 놀러가는 것과 똑같죠. 스트레스 풀러 가는 거지, 음악을 들으러 가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엔지니어가 음악과는 상관없이 미리 세팅을 다 해 놓더군요. 그리곤 ‘스타일이 뭐냐?’고 물어봐서 ‘발라드다’ 혹은 ‘댄스다’라고 대답하면 버튼 하나 눌러서 한번에 쫙 설정을 해요. 메인 엔지니어가 이런 세팅을 미리 해 오고 공연 때나 녹음 때는 메인 엔지니어는 오지도 않고 서브 엔지니어나 어시스트 엔지니어가 찍기만 하죠. 사실 요새는 녹음할 때 연예인이 안 와요. 가수가 녹음하는데 왜 오겠어요. 다 작곡자가 하거나, 작곡자가 안 오면 편곡자가 와서 하죠. ‘가수’ 조동익의 ‘노래’를 듣고 싶다! Q: 역시나 이야기가 우울한 쪽으로 흘러가니 여기서 멈추겠습니다. 사실 뭐 늘 우울한 건 아니니까요. 다시 조동익 님에게 몇 마디 여쭤 보고 마무리하겠습니다. 조동익의 이름을 내세운 음반은 영화음악 음반인 [Movie](1998), [내 마음의 풍금](1999) 이후 아직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1999년 경 인터뷰를 했을 때 새 음반을 준비한다고 하면서 “[동경]과도 많이 달라질 것이다. 1집 음반을 내놓고 후회되는 부분이 있고, 다시 포크와 록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때 준비한다고 말한 음반은 끝내 나오지 못한 것인가요? – 이런저런 이유로 작업을 중단한 상태죠. Q: 하나음악이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말을 들었지만 조동익 님이 ‘후배’들의 일에 너무 매달려서 그런 게 아닌가라는 의문도 듭니다. (조)동익 님은 너무 프로듀서의 일을 해야 하니까 정작 본인 음악은 못하시는 건 아닌지… – 저도 음악을 하고 싶죠. 사실 프로듀서 일이란 것은 별로 재미없어요. 게임이 재미있죠(웃음), Q: 그렇다면 후배들이 (조)동익 님이나 나아가 (조)동익 님의 음반이 나오도록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요? = 맞아요. 집에서 편안하게 자기 음악 만들게 해 줘야 하는데 하나 음악이 (조)동익 형을 필요로 하니… 그런데 그게 그렇잖아요. 어디에서나 ‘대표’로 불려나가는 사람은 한 사람이니까 무슨 일이 떨어지면 (조)동익이 형이 맡게 되버리는 것이죠. Q: 개인적 견해로는 (조)동익 님은 연주도 보통이고. 편곡도 특별한 거 없고, 프로듀싱도 그저 그렇고(just kidding!) 노래를 제일 잘하는 것 같은데 노래를 들은 지 너무 오래된 것 같습니다. = (조)동익이 형이 노래하는 것은 진짜 매력이죠! 그런데 잘 안 하려고 해요. Q: 조동익 님은 대중적이어야 될 사람인데 컬트가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예전에 다른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더 나빠지지만 않으면 좋겠다”고 한 말은 지금도 유효한가요? (조)동진 님도 느릿느릿하고 진지한 어투로 “나는 세상이 나아질 거라는 기대가 별로 없다”고 말하던데 그게 하나음악의 철학인가요? 제 한 가지 소원이 하나 기획 잘 된다는 말을 듣는 건데 ‘잘 된다’는 말을 언제 들을 수 있으려나요? – 평생 힘들지도 몰라요. 하하. Q: 그래도 ‘잘 되는’ 일은 없어도 ‘더 나빠지는’ 일은 없기를 바라고 녹음기를 끄겠습니다. 여러 분들의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꿈]이 대박 터지기를 기원할께요~ 그리고 후배들이 (조)동익이 형의 짐을 덜어주기를! 관련 글 엄인호 vs 조동익: 후광보다 더 밝게 비친 언더그라운드의 두 불빛 – vol.5/no.13 [20030701] 조동진 vs 이정선: ‘한국형’ 싱어송라이터의 두 개의 초상 – vol.5/no.11 [20030601] 기나긴 기다림, 짧은 만남 그리고 긴 여운: 조동진과의 인터뷰 – vol.5/no.11 [20030601] 배리어스 아티스트 [우리 노래 전시회 I] 리뷰 – vol.5/no.6 [20030316] 어떤 날 [어떤 날 I(1960·1965)] 리뷰 – vol.3/no.8 [20010416] 어떤 날 [어떤 날Ⅱ(출발/덧없는 계절)] 리뷰 – vol.5/no.13 [20030701] 야샤 [Yasha Collection] 리뷰 – vol.5/no.13 [20030701] 조동익 [동경] 리뷰 – vol.5/no.13 [20030701] 조동익 [Movie] 리뷰 – vol.5/no.13 [20030701] 배리어스 아티스트 [겨울노래] 리뷰 – vol.5/no.13 [20030701] 배리어스 아티스트 [바다] 리뷰 – vol.5/no.13 [20030701] 배리어스 아티스트 [꿈] 리뷰 – vol.5/no.11 [20030601] 장필순 [Soony 6] 리뷰 – vol.4/no.23 [20021201] 김창기 [하강의 미학] 리뷰 – vol.2/no.13 [20000701] 관련 사이트 하나뮤직 공식 사이트 http://www.hanamusic.co.kr/ 조동익 다음 카페 사이트 http://cafe.daum.net/jodongi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