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토드 번즈(Todd Burns) | guest contributor
번역: 김필호 antioedipe@hanmail.net | contributor

0. 옮긴이의 소개

이 글은 스타일러스 매거진(http://www.stylusmagazine.com)에 실렸던 “Ono Yoko: A Biography Of Musical Development And Critical Reevaluation”을 제목만 약간 바꾼 한국어 번역본이다. 저자 토드 번즈는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미술사를 전공하면서 스타일러스 매거진의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weiv] 게재를 흔쾌하게 허락해 준 그에게 이 자리를 빌어 다시 감사의 말을 전한다.

1. 들어가며

음악가로서 오노 요코의 생애를 고찰하면서, 그녀의 독특한 선견지명이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가, 그리고 그녀의 소리가 어떻게 전위 예술가 공동체 내에서도 죄스러울만치 제대로 대변되지 못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이 글의 바램이다. 오노의 음악적 성과물은 대중 매체와 대중 문화에서 무시당해왔으며, 그녀의 음악은 들어줄 수 없거나 외계적인(alien) 것으로 간주되었다. 오노의 성(性)과 인종이라는 요인이 음악 팬들의 머리 속에 남아있는 그녀의 고약한 이미지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 이 글의 주장이다. 다른 여러 전위적 작곡가 및 음악인들은 미래를 내다보는 음악적, 이론적 성취로 칭송받았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비평적 재평가를 받기도 한다. 오노의 경우도 조형 및 구상 미술 작업과 관련해서 어느 정도는 재평가가 이루어졌는데, 그 결과가 최근의 회고전 [Yes Yoko Ono]로 맺어졌다. 하지만 전위 음악 공동체 내에서는 아직도 그녀가 중요 인물로 여겨지지 않고 있다. 오노가 이 공동체에 참여했지만 번번이 억압당하고 배척당했다는 걸 감안한다면 이런 처우는 부당한 것이다. 이 글에서는 그런 사실들을 부각시키려 한다.

2. 이무기 여인 (Dragon Lady)

이무기 여인은 중국의 마지막 여제(女帝)인 서태후(西太后), 그리고 다른 수많은 아시아 여인들에게 붙여진 이름이다. 에드문드 백하우스(Edmund Backhouse) 경이 이 아시아의 지배자를 피와 섹스에 굶주린 요부(妖婦)로 묘사한 데 대해서는 이미 많은 비난이 쏟아졌지만(주1), 그런 고정관념은 여전히 남아 있다. 20세기에 가장 널리 알려진 이무기 여인 중에는 오노 요코를 꼽을 수 있다. 그녀가 저질렀다고 하는 범죄는? 전설적인 팝 그룹 비틀즈를 깨버렸다는 것이다. 이 주장의 상대적 진실성은 오늘날까지도 의문에 부쳐져 있고 아마도 완벽한 해답은 결코 주어지지 않겠지만, 존 레논과 오노 요코의 결합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오노는 플럭서스(Fluxus) 예술 운동에 참여한 전위 예술의 유명인사였고, 레논은 수백만의 변덕스럽지만 경배하는 팬들에게 팝 음악을 팔아치우는 “상품 산업”의 화신이었다.(주2)

20030619024132-yoko1[Blueprint For A Sunrise](2001) 표지. 서태후로 분한 오노 요코

오노를 겨냥한 인종차별과 증오는 매우 쓰라린 것이었다. 1992년 한 레코드사에게서 6장짜리 회고집을 내자는 제의를 받고, 오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온 세상이 나와 내 음악을 증오했죠… 이제 그건 묻어버리고 내버려 둡시다.”(주3) 2001년에 이르면 그녀는 최소한 이런 남아있는 편견이 자신의 작업을 평가하는 데 끊임없이 끼여들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처럼 보인다. 그 해 오노는 [Blueprint For A Sunrise] 앨범에서 이무기 여인으로서 자신에 대한 이미지를 거꾸로 부각시켜 그런 고정관념에 대한 주의를 다시금 환기시켰다. 앨범 표지에서 오노는 서태후의 원래 초상을 가져다가 자신의 얼굴을 옮겨붙였다. 이처럼 자신에게 씌워진 이무기 여인이라는 오명을 비꼬고 미묘하게 전용(주4)함으로써, 오노는 일반 대중과 학계에 공히 존재하는 편협함을 넘어서 자신의 작업이 영속적이며 시사하는 바가 많음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상황주의적(situationist) 영향을 받은 작품은 그녀의 생애에 걸쳐 있는 다른 어떤 작업들과도 다른 것이다. 그러나 예술계에서 그녀의 경력이 입증하듯, 오노는 어떤 예측도 불허하는 인물이었다.

Yoko Ono, “It’s Time For Action” from [Blueprint For A Sunrise]

3. “아버지는 은행가가 된 데 매우 실망한 분이었지요.”(주5)

피아니스트가 되지 못하고 은행가가 된 오노 에이스케(小野英輔)는 음악의 영광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해서, 자신의 첫 번째 자식은 집중적인 음악 교육을 시킬 것을 다짐했다. 오노 요코는 1933년 2월 18일에 에이스케와 그의 처 이소코(磯子) 사이에서 첫째로 태어났다. 요코가 예술가를 추구한다면 자기 자신만의 길을 찾으리란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분명해졌다. “콘서트에 가서 있다가 몇 분 안 지나서 걸어나온 것을 기억해요. 계속 ‘내가 왜 여기 온 거지?’하고 되뇌었죠.”(주6) 요코의 이 수사적 의문에 답을 제공한 것은 오노 가(家)의 경제적인 부유함이었다. 에이스케는 성공한 은행가로 요코가 태어나기 6주 전에 샌프란시스코로 전근하게 되었다. 아버지에 대한 요코의 첫 번째 생생한 기억은 1997년 조디 덴버그와의 인터뷰에 나와 있다. “아버지의 첫 말씀은 ‘네 손 좀 보자’였죠. 내 손가락들 사이를 보시고는 ‘어, 이 부분이 좀 더 넓어져야 한 옥타브를 짚을 수 있을 텐데’라고 하셨죠.”(주7)

20030619024132-yoko2요코와 부모, 1935년 샌프란시스코

1938년 일제의 전면적 중국 침략에 대한 반응으로 미국 내에서 반(反)일본 정서가 일자, 그해 에이스케는 가족을 일본으로 돌려보냈다. 요코의 어린 시절 일본에 대한 기억은 고독한 것이었다. 일본 귀족의 생활양식을 포용한 어머니 이소코는 요코에게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요코 자신은 특권층으로서의 삶에 휩쓸리지 않았지만, 매우 부유한 가정에서 보낸 아동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렇지 않았다면 일본에서든 미국에서든 성과 인종으로 말미암아 그녀에게 기회의 문은 열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오노는 항상 국외자(outsider)로서의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다. 서양 세계에서는 동양인으로서, 일본에서는 현대 일본의 실제에 대해 거의 아는 바 없는 엘리트의 딸로서.

4. “표현의 감정, 목소리의 감정에 조율하고 싶었죠”(주8)

1952년에 이르러 요코는 지유가쿠엔(自由學園) 음악학교에서 초등교육을 마치고, 졸업과 더불어 뉴욕 주 스카스데일(Scarsdale)에 있는 가족들과 합류했다. 같은 해 미 정부는 최초로 아시아계 이민의 귀화를 허용한 맥캐런-월터스(McCarran-Walters) 법안을 통과시켰는데, 어떤 인터뷰에서도 요코가 미국으로 이주한 이유 중 하나로 이 법이 언급된 적은 없다. 법적인 규제가 요코 가의 대륙간 이주에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은 부유층으로서의 지위 탓일 것이다. 뉴욕에 있는 동안, 요코는 새라 로렌스 칼리지(Sarah Lawrence College)에서 음악 공부를 계속한다. 그녀가 아버지를 통해서 아놀드 셴베르크(Arnold Schoenberg), 안톤 베베른(Anton Webern), 알반 베르크(Alban Berg) 등 20세기 초 주요 작곡가들의 작품을 접한 것이 바로 이때다.(주9) 그녀는 특히 베르크의 오페라에 관심이 있었는데, 이는 셴베르크가 창시한 12음 기법으로 작곡된 것들이었다. 12음 기법은 고도로 수학적인 것이어서, 작곡상에 우연의 여지가 별로 주어지지 않는다. 작곡가에게는 곡 초기에 도입되는 제약들로 인해 극소한의 자유만이 부여된다. 베르크는 이런 제한적인 틀 내에서도 흥미로운 선택 가능성들을 제공했는데, 이는 특히 그의 가장 유명한 오페라 작품들인 [Lulu]와 [Wozzeck]에서 잘 나타난다. 베르크는 수학적 작곡 기법과의 연관성을 잃지 않으면서 노래 부분의 음역을 인간 음성의 범위를 넘어서도록 작곡하는데, 그러면서도 그의 음악은 도전적이리만치 서정성을 잃지 않는다. (주10)

오노가 갇혀버렸다고 느낀 것은 바로 이 12음 운동이 가져온 동시적인 혁신과 제약이었다. 베르크의 해법은 오노에게 큰 호소력이 있었고, 그녀의 초기 작곡에 주요한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특정한 문제에 대해서 다른 이의 예술적 해법에 갇혀있게 된다는 불편한 느낌은 오노에게 매력을 끌지 못했다. 이렇듯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못한다는 느낌은 오노가 하고 있던 다양한 분야의 작업들로도 번져나갔다. 1996년 [Wired]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난 어떤 매체에 대해서든 부적응자라고 느꼈어요”라고 말했다. “그림, 시, 음악 같은 거보다 뭔가 더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내가 ‘추가적 행위(additional act)’라고 부르는 그런 것 말이에요.”(주11)

20030619024132-yoko3오노 요코의 행위 예술 “Cut Piece” 1965년 뉴욕 카네기 홀

매체들 간의 경계를 초월하는 종합 예술(interdisciplinary art)에 대한 오노의 믿음은 또한 존 케이지(John Cage)를 접함으로써 가열되었다. 1958년 오노와 그녀의 첫 남편인 젊은 일본 음악인 이치야나기 토시(一柳 慧)는 뉴욕 시에서 열린 케이지의 실험음악 작곡 강좌에 참석했다. 이 강좌에는 막 떠오르기 시작한 1960년대 전위 예술인들도 대다수 선보였는데, 케이지는 시각적이든, 음악적이든, 혹은 문학적이든 간에 작품 제작에서 우연과 불확정성의 역할을 강조했다.

이 불확정성은 요코의 후기 작품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그녀가 녹음한 모든 곡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기발한 표현은 일종의 동물적인 괴성인데, 이는 대중음악계에서든 전위음악계에서든 정상적인 창법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과 어떤 분명한 연관도 갖지 않는다. 모음(母音), 음소(音素)들은 존재하지만, 일관성에 근접할 만한 어떤 관련성도 맺어지지 않는다. 구체적으로 보자면, 가장 큰 대중적 히트곡인 “Walking On Thin Ice”에서 오노는 음악의 포스트펑크/디스코 박동으로부터 이탈하는 비명소리를 들려준다.(주12) 오노는 여러 곡들에서 아직 정신에 의해 코드화되지 않은 전음성적 발화(前音聲的 發話: sub-vocalizations of speech) — 조리있고 말많은 사람도 하게 되는 말더듬같은 것 — 를 흉내내려는 시도를 했다. 팝송이라는 틀 내에서도 오노는 일반적으로 실수라고 일컬어지는 것들을 드러내 놓아야만 했고, 그럼으로써 팝송이라는 형식을 자신의 독특한 스타일로 전복시켰다. 이와 동시에 우연에 대한 그녀의 관심 또한 등장했는데, 오노는 자신의 문화적 유산이 작곡에 어떤 아이디어를 제공해줄 수 있을까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난 보통 서양 음악 기보법과 다른 종류의 표기들을 만들어내게 되었죠. 그러니까 동양과 서양 기보법의 중간에 있는 거요, 왜냐하면 어머니로부터 동양 음악 영향도 받았으니까요. 어머닌 내게 동양 악보들을 보여주셨어요. 그건 우리에게 익숙한 서양 악보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들이었죠.”(주13)

Yoko Ono, “Walking On Thin Ice” (12”Single, 2003)

(2회에 계속됩니다)

[후주] 주 1: 스털링 시그레이브(Sterling Seagrave)의 [Dragon Lady: The Life And Legend Of The Last Empress Of China](London: Vintage Books, 1991)은 백하우스의 주장에 대한 학술적 해체구성을 불러온 대표작이다.
주 2: 문화상품은 테오도어 아도르노(Theodor Adorno)의 “문화산업”론에 의해 널리 알려진 용어다. 그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진정한” 예술과 상반되는 문화산업의 산물을 대중에게 주입함으로써 수동적인 만족감과 정치적 무관심의 상태를 유지한다. 아도르노와 막스 호르카이머(Max Horkheimer)의 공저 “문화산업: 대중 기만으로서의 계몽”([계몽의 변증법], 문예출판사 1995)에 개요가 잘 나와 있다.
(역주: 플럭서스 운동에 관해서는 관련 사이트란 참조)
주 3: 조디 덴버그(Jody Denberg), “Yoko Ono In 1997” 2000년 8월
주 4: 전용(轉用, detournement)이란 용어는 상황주의 예술 운동에서 “어떤 사물을 예술적 맥락에서 그 원래 용도나 경로로부터 이탈시키는 과정”을 의미한다. 상황주의 운동의 개념정의 및 그 가장 명료한 성명서는 기 드보르(Guy Debord)의 [스펙타클의 사회] (현실문화연구, 1996)에서 찾아볼 수 있다.
주 5: 찰스 맥캐리(Charles McCarry)의 [Esquire]지 1970년 12월호 기사 “John Rennon’s Excrusive Gloupie” 중 오노의 말.
주 6: 조디 덴버그, “Yoko Ono In 1997”
주 7: 같은 글
주 8: 같은 글
주 9: 같은 글
주10: George Perle, [The Operas Of Alban Berg](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0)
주11: 조이 프레스, “Yoko Ono” [Wire]지 1996년 4월호
주12: 12인치 싱글 “Walking On Thin Ice”는 발매 직후 빌보드 클럽 싱글 챠트 13위에 올랐다.
주13: 조디 덴버그, “Yoko Ono In 1997”

관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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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이트
스타일러스 매거진 영어판 원문
http://www.stylusmagazine.com/articles/article030512page01.html
오노 요코 공식 페이지(Capitol Records)
http://hollywoodandvine.com/yokoono
AIU: A Yoko Ono Box
http://www.kaapeli.fi/aiu
Instant Karma 오노 요코 페이지
http://www.instantkarma.com/yokomenu.html
뉴욕 일본 협회 오노 요코 페이지 (일본어)
http://www.new-york-art.com/Artist-Yoko-Ono.htm
플럭서스 예술 운동이란 무엇인가?
http://www.kunsttrip.net/fluxus.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