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봉 [마침표가 아닌 느낌표의 예술: 박성봉 교수의 대중문화 읽기] 일빛, 2002. 2.

20020529042933-pop1996년이었던가. 병원에서 쪼그리고 앉아 박성봉의 [대중예술의 미학]을 읽었던 기억이. 대중문화에 대한 진지한 관심은 높아갔지만 학계만은 여전히 냉담하던 시절, 대중문화의 이해도 아니고 대중’예술’의 ‘미학’이라는 제목은 나의 관심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미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설레는 기대감으로 책을 읽어 내려갔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리 유쾌했던 기억이 아니었다. 미학이론과 자신의 대중문화 경험을 어설프게 끼워맞추려 한 흔적이 곳곳에 보였을 뿐더러 자기 목소리는 없고 누구누구는 이렇게 말했더라 하는 인용만 가득한 글이었기 때문이다. 그 책은 내게 반면교사로서의 교훈만 남겨주었다.

서점에서 [마침표가 아닌 느낌표의 예술]을 보았을 때 그때의 기억이 고개를 내민 것은 당연했다. ‘박성봉 교수의 대중문화 읽기’라. 교수라는 직함이 주는 이미지도 잠시 스치고 지나갔다. 어쨌든 책을 읽어본 소감을 말하자면 일단 자신의 문제틀이 꽤나 정립된 듯 보였다. 아울러 한 학기의 강의를 그대로 글로 옮겨놓은 것 같은 생생한 표현과 비유들로 읽는 재미가 있었다. 몇몇 영화에 대해서는 제법 참신한 해석을 내리기도 한다. 하지만 ‘쉽다/재미있다’는 말은 ‘안이하다/가볍다’는 말의 이면이 될 수도 있다. 개인적인 잡담은 이만하고 이 문제를 좀더 살펴보자.

대중문화(혹은 예술)에 관한 책은 대체로 세 가지 근본적인 질문에 맞닿게 된다. 첫째는 예술과 비예술의 문제이고, 둘째는 일반예술과 대중예술의 문제이다. 셋째는 나중으로 미뤄두자. 먼저 첫 번째 문제에 대해 그는 학교에서 예술이라고 배우는 것에서 논의를 시작한다. 예술의 개념이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 기술 가운데 사용가치로부터 독립된 것들이 모여 예술이라는 동네를 이루었다는 것, 따라서 예술이 일종의 힘겨루기 과정이라는 것 등이 이런 맥락에서 논의된다. 여기서 그는 예술을 ‘만남이 일어나는 것’으로 설명한다. 이는 나만의 밥상을 받는 느낌이라는 말로도, 또 북극성이 뜨는 경험이라는 말로도 표현된다. 모두 특별한 만남의 계기를 쉽게 풀어쓴 비유로 예술적 경험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는 예술에 대해 본질이 아닌 기능적 접근을 하고 있다. “예술은 있되 예술성의 본질은 없다”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대중예술은 이러한 힘겨루기 과정에서 소외되어 변두리로 내몰린 것을 말한다. 흔히 말하는 저급하고 통속적인 것들이다. 이를 가리켜 그는 ‘뽕의 기운’이 있다고 말한다. 일반예술의 ‘품위의 기운’과 대비되는 말이다. 여기서 그는 텍스트의 속성을 가정하는 형식주의나 이분법을 조심스레 경계하기 위해 작품을 둘러싼 ‘동네’라는 은유를 즐겨 사용한다. 또한 이런 식의 구분은 과도기적 양상일 뿐 문화적 차별이 없어지면 고급예술도 대중예술도 아닌 ‘그냥 예술’일 뿐이라고 확신한다. 어쨌든 뽕 기운은 그가 대중예술에서 줄기차게 확인하고 싶어하는 성질로 등장한다.

여기서 세 번째 질문이 문제시된다. 그것은 바로 이론과 실제의 문제이다. 이론은 실제를 분석하고 분류하는 과정에서 그 아래에 놓인 근본적인 질서나 법칙을 드러내는 작업이다. 이때 이론과 실제 간에 알력이 생긴다. 이론이 많은 사실들에 놓인 공통점을 강조하느냐 개별성을 배려하느냐에 따라 이론의 일반성(추상성)이 결정된다. 가령 많은 것을 설명하려는 이론일수록 일반성의 수준은 올라가지만 세세한 차이를 놓칠 가능성이 높아진다. 반대로 세세한 차이를 다 인정하면 그것은 이론으로서의 힘을 잃어버린다. 그래서 이 둘 사이에 적절한 지점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많은 것을 두루 설명하면서 포괄적인 설득력을 갖춘 원리를 발견하는 것이 이론가의 과제인 것이다.

텍스트로 돌아오면 심각한 문제가 발견된다. 결국 그는 뽕의 기운을 가지고 ‘모든’ 대중예술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설명될 정도로 대중예술이 뽕이라는 특징을 일관되게 공유하고 있을까? 그의 말대로 품위의 기운과 뽕의 기운이 빛과 그림자의 관계라면, 품위로 무장한 예술이 위력을 행사했던 18-19세기 유럽에서는 그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처럼 권위와 제도의 힘을 빌어 근근히 버티는 시대에는 논점이 약하다. 그래서 그는 대중예술 내의 상이한 시도들, 특히 뽕의 기운을 멀리하려는 흐름에 대해 무관심하다. 언더그라운드 내지 아방가르드 문화에 대해 극히 형식적인 배려만 하고 있는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나아가 그는 뽕의 기운을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편리하게 잡아늘인다. 그에 따르면 조수미의 노래도, 심지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도 뽕의 기운을 갖고 있다. 이것도 모자라 상업적으로 실패한 몇몇 노래를 뽕의 기운이 결여된 탓으로 돌리기까지 한다.

뽕의 기운으로 대중예술에 접근하려는 시도는 그가 처음이 아니다. 6년 전쯤 출간되었던 이우용 PD의 [우리 대중음악 읽기]는 한국 가요의 본질을 한글의 언어적 특징에서 찾았고 이를 가리켜 뽕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뽕을 좀더 넓게 통속성이라 해석하자면, 그가 이 책에서도 언급했고 일부를 직접 번역한 바도 있는 로버트 패티슨(Robert Pattison)의 [The Triumph of Vulgarity]를 들 수 있다. 여기서 그는 록 음악을 통속화된 낭만주의의 시각으로 접근한다. 어쨌든 대중예술에서 뽕의 기운이라 불리는 뭔가가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문제는 그가 외연을 너무 크게 잡았다는 것이다. 책 어디선가 그는 대중예술보다 통속예술이라는 말을 선호한다고 했는데 정말 그랬더라면 좋았을 뻔했다. 그렇더라도 그저 통속성의 확인을 넘어서는 작업이 필요하다. 무릇 통속성의 구성과 의미를 좀더 정교하게 규명할 필요가 있다.

통속성은 그 자체로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다 있다. 만약 통속성이 주목을 받는다면 그것은 이전까지 무시되어온 측면을 인정해준다는 보상으로서의 의미가 강하다. 그 자체가 미덕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또 과도한 통속성은 반발을 낳고 전적인 부정 내지 새로운 통속적 시도들을 선보이게 한다. 더욱이 통속성이 갖는 보수적인 면도 놓칠 수 없다. 또 품위만 권위적인 것이 아니라 통속성 또한 권위적일 수 있다. 우리는 통속적이기를 강요받는 숱한 경험들을 떠올리게 된다. 그래서 통속성을 두고 벌어지는 상반된 힘들의 긴장이 좀더 치밀하게 고찰될 필요가 있다. 어쩌면 대중예술을 움직이는 것은 통속성이 아니라 이를 둘러싼 힘들의 긴장관계이기 때문이다. 다행인 것은 마지막 장에서 이러한 면에 대한 고민이 문득 엿보인다는 점이다. 다음에는 개인적인 신념과 경험의 나열이 아닌 이론적으로 좀더 정련된 그런 글을 읽고 싶다. 20020525 | 장호연 bubbler@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