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1018102108-paceisglacial한국계 미국인 인디 밴드 씸의 가장 최근 앨범 [The Pace Is Glacial](1998)이 강아지 문화예술에서 라이센스로 발매된다. 씸은 그동안 미국 인디 씬에서 착실하게 인지도를 높여온 밴드로, 현재의 멤버 구성은 박수영(Sooyoung Park, 보컬, 기타), 이승호(미국명 John Lee, 기타), 신성우(미국명 William Shin, 베이스), 그리고 크리스 맨프린(Chris Manfrin), 이렇게 4인조이다. 그러나 이 앨범을 낼 당시에는 이승호가 빠져 있었고 대신 기타리스트 렉 슈레이더(Reg Shrader)가 밴드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승호는 심과 함께 미국 인디 씬에서 명성을 날리던 어미니어쳐(a-Miniature)라는 밴드의 멤버였는데, 최근 씸에 합류했다.

씸의 리더 박수영은 이미 80년대 중반부터 인디 씬에서 활약을 시작한 인물인데, 동양계, 특히 한국계가 매우 드문 인디 록 씬에서 고군분투해온 사람이다. 그가 처음에 활동하던 밴드는 비치 매그넛(Bitch Magnet)이라는 밴드. 이 밴드 출신의 렉시 미첼(베이스)과 수퍼청크의 맥 맥코건(드럼), 이렇게 3인조로 씸을 구성하여 첫 앨범을 발매한 해가 1992년이다. 그들의 첫 앨범의 제목은 [Headsparks]. 그 이후 [The Problem with Me](1993), [Are You Driving Me Crazy?](1995)가 정규 앨범으로 발매되었으며 그 밖에 몇 장의 EP와 싱글들이 있다. 정규 앨범으로 치자면 [Pace Is Glacial]이 네 번째 앨범이 되겠다.

씸의 음악은 ‘조용한 불’이다. 파란 불꽃. 그 온도가 너무 뜨거워 오히려 푸른 색깔을 지닌 음악. 씸의 음악은 내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음악이다. 그 힘이 한 번에 폭발하지 않고 서서히, 차분하게 보폭을 옮기다가 끝내 터진다. 때로는 끝없는 오솔길처럼 길게 이어진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씸의 음악을 “이모-코어(emo-core)”라 부르기도 하고 “슬로-코어 (slow-core)”라 부르기도 한다. 장르명이 무엇이든, 씸의 음악에서 록큰롤은 새로운 어법을 계시받는다. 자주 이야기되는 것이긴 하지만, ‘서서히 쌓아져서 끝에 힘이 작열하는’ 구조를 지닌 록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씸의 음악을 듣다보면, 처음에는 심플하면서도 몽환적인, 그리움을 머금고 있는 멜로디와 기타 라인에 주목하게 되다가, 나중에는 리듬의 구성이 씸 음악의 핵심임을 깨닫게 된다. 씸의 리듬은 생각보다 굴곡이 많고 유장하다. 변화가 많지만 갑작스럽게 변화하지 않고 춤을 추듯 슬금슬금 이 리듬에서 저 리듬으로 옮겨 다닌다. 그 옮겨 다님의 기운이 씸 음악의 서서히 작열하는 구조를 만들어 낸다. 리듬의 굴곡을 보장하는 것은 박수영과 이승호의 정교하고 심플한 기타 라인이다. 그 절제된 라인이 리듬 파트에 많은 공간적 자유를 부여하는데, 그 안에서 크리스 맨프린이 놀면서 리듬의 굴곡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존 콜트레인이 엘빈 존스와 함께 밴드를 하던 시절을 떠올리도록 한다. 존 콜트레인은 심플한 단음계의 멜로디를 짚고 그 묵직한 힘을 전이받은 엘빈 존스가 리듬을 분할하고 감정을 만들어 낸다. 록의 문법을 가지고 그러한 방식의 음악을 시도한 밴드는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박수영의 목소리나 기타가 분노를 참고 있다면, 그 참음의 안쪽에서 들끓는 어떤 불같은 마음을 리듬의 굴곡이 보여주고 있는 듯이 보이는 음악.

확실히 그들의 음악에서는 조용한 분노가 느껴진다. 박수영은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증오의 원천이 극단적인 자본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미국 사회의 모순에 있음을 말했다. 아마도 동양계로 미국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느끼는 보이지 않는 불합리함 속에서 그 분노가 안으로 안으로 응어리졌을 것이다. 씸의 음악은 확실히 어떤 ‘응어리’처럼 보인다.

트랙별로 짤막한 감상을 적어보겠다. 지난 앨범보다 빨라질 곡은 더 빨라졌고 느린 곡들은 한없이 느려졌다. 첫 곡 “Little Chang, Big City”는 차분하지만 힘있는 기타리프를 따라가는 정교한 드럼 비트와 베이스 라인의 인트로가 인상적인 곡이다. 깔끔하지만 힘이 넘치는 드라이브감. 다음 곡 “Get Higher”는 씸의 노래 중에서 흔히 만날 수 없는 스트레이트한 록. 노이즈의 적절하고도 능숙한 사용이 돋보인다. 세 번째 곡 “Wig”는 씸 특유의 서정성이 빛나는 곡, 특유의 ‘서서히 터지는 불꽃’의 분위기, 네 번째 곡 “Intifada Driving School” 역시 심플하면서도 신나는 곡인데, 리듬의 구성이 흥미롭다. 다음 곡 “Kanawha”에서는 곡의 중간부에 나오는 긴 터널 같은 멜로디의 흐름이 인상적이다. “Nisei Fight Song”은 느리지만 강력한 힘을 지닌 곡이다. 이런 곡들은 씸의 힘을 느끼게 한다. 그 다음 곡 “The Prizefighters” 역시 마찬가지. 다음 곡 “In the Sun”은 예상을 뒤엎은 도발적인 느낌이다. 박수영의 드문 ‘절규’와 피드백이 심금을 울린다. “Inching Towards Ju rez”는 정말 느리게, 느리게 목적지로 다가가는 우리 인생의 한 단면을 느끼도록 해주는 노래. 아름다운 아르페지오와 박수영의 차분한 목소리가 가슴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다. 다음 곡 “Pale Marble Movie” 역시 내성적이고 명상적인 분위기. 그리고 마지막 곡 “Aloha Spirit”, 미니멀한 반복 속에서 추억을 길어내는 듯한, 점점 고조되었다가 다시 스러지는 담담한 피날레다.

앨범의 제목처럼, 이들의 행보는 차분하다. 흔들리지 않고 두 눈 똑바로 뜨고 자기 갈 길을 가는 밴드가 심이다. 미국 같이 과잉의 나라에서, 이렇게 놀라운 집중력을 지닌 사운드를 심 말고 누가 또 들려주랴. 아마도 이들이 자신들의 먼 고향, 동양의(크리스는 아이리쉬니까, 그의 마음 속 고향도 먼 곳에 있다) 미덕인 절제와 균형을 몸 속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20000515 | 성기완 creole@nownuri.net

* 이 글은 [The Pace Is Glacial] 라이센스 앨범 라이너 노트입니다.

수록곡
1. Little Chang, Big City
2. Get Higher
3. Wig
4. Intifada Driving School
5. Kanawha
6. Nisei Fight Song
7. The Prizefighters
8. In the Sun
9. Inching Towards Ju rez
10. Pale Marble Movie
11. Aloha Spir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