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OON-01

1.
굳이 가사 찾아가며 음악 들을 만큼 부지런하지도 않을 뿐더러, 오히려 너무 유명해서 정작 내용에 무심했던 노래들이 있다. 예를 들어 얼마 전까지 “Danny Boy”가 그렇게 슬픈 노래인 줄 모르고 있었다. 전쟁 나가는 아들에게 어머니가 “네가 돌아오면 내 무덤 앞에서 사랑한다고 말해주렴”이라고 전하는 내용이니, 이건 도저히 슬프지 않을 도리가 없다. “Scarborough Fair”도 오랫동안 당연히 사이먼&가펑클의 노래인 줄 알았다. 16세기부터 영국에서 구전되어온 작자 미상의 노래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놀랐다. 이 노래의 가사도 슬프기는 마찬가지다.

2.
아이다 유의 만화 [건슬링거 걸]의 시놉시스를 처음 접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최종병기 그녀]였다. [니키타]와 비교하는 사람도 꽤 많지만, 뭐 설정이야 예상 가능한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의체화한 소녀를 인간병기로 이용한다는, 전형적인 사이보그 걸 액션이니까. 그런데 일단 책을 펼쳐보면, ‘의체화’ 같은 SF의 요소 혹은 정신과 육신의 상관관계 같은 철학은 어느새 부차적인 것이 된다. 실상 이 작품의 체질은 하드보일드 느와르에 가깝다. 일단 이탈리아가 배경이기도 하고, 사회적 시스템 등 세세한 고증도 매우 충실하다(그래서인지 영미권에서도 인기가 높다). 작품에서 가장 비중 있는 주인공인 장과 조제 형제의 일가족 폭탄테러 사건 역시 실화를 모델로 삼았다. 1980년대 시칠리아 마피아와 맞섰던 스타 검사 지오반니 팔코네가 1992년 폭탄으로 암살당한 사건이 그것이다. 싸우는 대상이 마피아가 아니라 북부 이탈리아 독립을 주장하는 극우 정치조직 ‘5공화국파’라는 깃이 결정적으로 다른데, 오히려 이 점이 서로의 입장과 복수심에 절제된 현실성을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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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박찬욱 감독은 느와르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 ‘숙명론적 비극’이라 정의한 바 있다. 그 지론에 비추어보면 [건슬링거 걸]은 필연적인 비극을 이마에 대문짝만 하게 써 붙이고 있다. 죽음 직전의 10대 소녀들을 정부기관이 데려와 최첨단의 의학 기술로 살려내고, 약물을 투여해 ‘조건 강화’라는 세뇌를 시킨 다음 전투 기술을 주입한다. 소녀들에게는 각각 남성 담당관이 한 명씩 배정된다. 그 결과 이들은 월등한 신체 능력과 담당관에 대한 무조건적 충성심을 지니게 되지만, 기억상실과 미각의 마비 등 정신적, 육체적 후유증도 함께 따른다. 수명도 길지 않다. 말하자면 아이들의 부모를 죽이고, 그 아이들이 상관과 마약에 의존하도록 만드는 아프리카 소년병들의 이야기를 좀 더 고급스럽게 변주한 셈이다. 참 마뜩잖고 찜찜한 소재다.
그런데 담당관도 인간이다. 의체 소녀와의 관계에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주인공인 소녀들과 담당관과의 관계는 이 만화의 가장 핵심적인 테마가 된다. 주인공이 딱히 정해지지 않은 옴니버스 같은 인상을 주는 이유다. 장에게는 소녀가 도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고, 반대로 조제는 자신이 담당하는 소녀를 죽은 여동생 대신으로 여긴다. 그 외에도 선생과 학생 같은 관계, 부녀, 싸우다가 정드는 사이, 연정 등 다양한 군상의 페어가 등장한다. 어느 쪽이든 그 끝에 새드 엔딩이 입을 벌리고 있는 건 마찬가지다. “날 좋아해주지 않으면 당신을 쏘고 나도 죽겠다”는 섬뜩한 메시지는 현실이 된다.

4.
“Scarborough Fair”는 애니메이션 2기에서 추가된 에피소드 [클라에스의 하루]의 테마이며 엔딩곡이다. 스토리 자체를 이끌어나가는 캐릭터는 아니지만, 클라에스의 이야기는 특히 짠한 여운을 남긴다. 그녀는 화약 연기와 탄피에 파묻혀 살아가는 동료들과 달리 작전에 투입되지 않는 잉여다. 담당관이었던 라바로 대위는 클라에스를 자유롭게 만들어주려다 내부의 숙청으로 추정되는 사고로 사망했다. 그리고 쓸모가 없어진 그녀는 처분당할 뻔했으나, 연구소의 요청으로 기억이 지워진 실험용 의체가 되어 남는다. 엄격하고 무뚝뚝한 라바로와 고지식한 클라에스는 묘하게 어울리는 짝이었다. 라바로는 그녀에게 전투기술 외에도 ‘시간을 한가로이 보내는 즐거움’―피아노와 독서, 낚시 등을 일러주었다. 클라에스는 라바로가 죽은 뒤에도 텃밭에 허브를 기르고, 피아노를 치고, 그림을 그린다. “Parsley, Sage, Rosemary and Thyme”를 되뇌며 가사의 의미를 궁금해 하고, 한편 그녀의 과거와 현재, 그 노래의 의미를 모두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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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나는 즐거움이란 게 어떤 건지 모르겠어. 어째서 클라에스는 즐거울 수 있는 거야?”라고 묻는 동료에게 클라에스는 “글쎄, 분명히 옛날에 누구한테 배운 걸 거야.”라고 대답한다. 그녀는 어느새 죽은 라바로의 뒷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 뒷모습이 누구의 것인지, 자신이 왜 그런 걸 그리는지 알지 못한 채 계속 붓을 놀린다. 라바로는 없다. 그녀는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 그리고 손목에 찬, 맞지도 않는 스위스 밀리터리 시계는 계속 돌아간다. 사랑은 이미 죽었고, 과거는 매 순간 점점 멀어지고, 남은 자는 떠난 자를 추억하며 어지럽게 부유할 뿐이고, 그래서 “Scarborough Fair”처럼 불가능한 소망들을 떠올리며 부질없는 위안을 삼는다. 추억이란 과거는 죽어버렸다는 선언이다. 그것은 ‘자발적이고 의도적인 선택’이라기보다 ‘자발적이고 무의식적인 복종’이다. | 최승우_월간 [PAPER] 에디터. loonytuna@empal.com, @thethawing

 

“Scarborough Fair” from [클라에스의 하루] 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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