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국내 기업에서 만든 20GB짜리 하드디스크형 MP3 플레이어에 3만원 남짓한 이어폰을 물려놓고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Le Nozze Di Figaro)]을 듣는 중이다. 2006년 짤츠부르크 음악제 실황으로, 누군가 인터넷 라디오 방송을 녹음해서 MP3 파일로 변환한 뒤 자신의 웹하드에 올려놓은 음원이다. 이 실황은 2007년 6월에 DVD로 발매된다는데, 아마 어떤 사람들은 그 음원을 근거로 공연 DVD를 살지 말지 결정하게 될 것이다. 그 음원을 들으면서 나는 인터넷 채팅을 한다. 타이 록 밴드의 음악이 괜찮다고 하자 내 온라인 메신저 친구는 반신반의하는 이모티콘을 띄우며 한번 들어보자고 한다. 나는 파일을 압축해서 전송해 준다. 저작권 문제 때문에 그 메신저의 최신 버전에서는 확장자가 ‘.mp3’일 경우 파일이 전송되지 않는다. 확장자를 바꿔 보내거나 압축해서 ‘.zip’ 형태의 파일로 보내야 한다. 그 파일은 태국 로큰롤 밴드의 홈페이지에 홍보용으로 올라 있던 것이다. 친구는 음악이 괴상하게 들린다고 말한다. 나는 친구에게 미국 사람이 한국 로큰롤을 들어도 비슷한 생각을 가질지 모른다고 말한다. 그 와중에 친구는 P2P 프로그램에서 국내 가수의 신보를 검색하고 있다. 다운받으면 내게도 주겠다고 했지만 나는 사양한다. 문득 이 모든 것이 신기하다는 생각이 든다. 짤츠부르크 음악제, 타이 록 밴드, P2P와 온라인 메신저를 통한 음원 전송은 실질적으로 전혀 새로운 단계의 음악 생활 방식을 통해 하나로 엮인다. 즉 이는 MP3라는 새로운 음악저장/재생매체가 만들어낸 음악 생활 방식이다. 두 문단이나 변죽을 울린 끝에 소개하는 이 책, [소리를 잡아라(Catching Sound: How Technology Has Changed Music)]에 나온 말을 빌자면 MP3가 만들어낸 ‘포노그래프 효과(phonograph effect)’다. 저자인 마크 카츠(Mark Katz)의 말에 따르면 포노그래프 효과란 ‘녹음의 영향이 드러나는 방식'(p.15)이다. 저자는 자신있는 말투로 이것이 책의 주제라고 선언한다. 녹음 기술이 음악을 듣는 방식, 연주하는 방식, 만드는 방식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번역서 기준으로 40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 중 1/4정도를 각주와 참고문헌으로 무장한 책의 주제치고는 당연한 얘기인가? 하지만 이것이 여러분이 느끼는 것만큼 당연한 주장은 아니다. 녹음의 목적이 ‘원음의 완벽한 재생’에(만) 있다는 것은 음악 애호가들의 오랜 신념 중 하나였다(‘소름 끼치는 원음의 감동’과 같은 오디오 광고 문구를 떠올려 보라). 약간 비약하자면, 이러한 신념은 음악이 음악 자체로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이데올로기와 영혼의 쌍둥이 비슷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두 주장 모두 음악이 세계와 맺는 기술적·경제적 역학관계의 중요성을 무시하거나 혹은 낮게 평가한다. 이 책이 넘어서는 것은 이러한 주장들이다. 그를 위해 동원하는 것은 생생한 사례분석과 실증적인 자료들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이 책 역시 최근 국내에 활발히 소개되고 있는 ‘새로운 음악학’의 경향과 보조를 같이 하고 있다고 해도 될 것 같다. 그리고 새로운 음악학을 다루고 있는 다른 책들이 그렇듯 이 책 역시 엄청나게 재미있다. 음악팬들의 정신을 쏙 빼놓고도 남는 일화와 주장들이 연이어 펼쳐져서, 나로서는 히트곡으로만 편집된 음반을 들을 때처럼 여기서 어느 장(章)이 가장 재미있는지 고르기가 어려울 정도다. 그래도 하나 골라서, 오늘날 바이올린 연주의 가장 기본적인 기법인 비브라토(vibrato)에 대해 설명하는 4장을 보자. 녹음 기술이 탄생하기 전에 비브라토는 ‘천박한’ 기법이었다. 그러나 바이올리니스트들이 녹음에 뛰어들기 시작하면서 비브라토는 중요한 기술로 자리잡는다. 그래야 녹음이 잘 됐고, 실수를 무마하기 쉬웠으며, 연주자를 볼 수 없는 감상자들을 위해 자신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증거도 내놓는다. 책의 뒤편에는 같은 곡을 녹음한 다른 시기의 세 가지 연주를 담은 부록 CD가 있다. 들어보면 후대의 녹음일수록 연주자들이 물에 젖은 강아지처럼 현을 부르르 떨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기술은 예술을 제약하지만 그로써 예술은 새로운 표현영역을 개척한다. 그 외에도 흥미로운 부분은 많다. 오버더빙과 피치 조정을 비롯한 소리 조작이 레코드 역사의 초창기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5장)이나 작곡과 버금가거나 그 이상의 놀라운 능력을 요구하는 턴테이블리스트들의 세계(6장), 팻보이 슬림(Fatboy Slim)과 퍼블릭 에너미(Public Enemy)를 통해 알아보는 디지털 샘플링의 음악적·정치적 효과들(7장)를 다루고 있는 장들은 모두 기술과 예술의 상호 교류에 대한 강력하고 현실적인 예들을 제시한다. 하지만 가장 눈길이 가는 부분은 MP3에 대한 논쟁을 다루고 있는 8장이다. 이 문제는 많은 사람들의 밥줄과 무한한 법적 분쟁이 대기하고 있는 예민한 영역이다. 저자는 “레코드 산업이 파일공유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파일공유 ‘때문에’ 번성할 수 있다고 믿는다.”(p.245) 이를 증명하기 위해 약간 복잡한 논리가 동원되는데, 그 과정을 여기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결론은? 포노그래프 효과를 전제로 한 절충적 관점의 기술 낙관론이다. “파일 공유는 전염병도 만병통치약도 아니다. MP3와 P2P가 막강한 이유는 도덕적으로 옳아서 혹은 틀려서가 아니라, 음악을 경험하고 퍼뜨리는 아주 새로운 방법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다.”(p.285) 아마 어떤 이들은 저자의 관점이 성선설에 근거를 둔 미국식 낙관론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 낙관론을 위해 동원한 근거와 논리들은 튼튼하다. 명료한 내용과 문장으로 된 책이지만 각종의 전문 용어와 인명 때문에 번역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번역자는 깔끔하게 옮겨놓았다. 옹드 마르트노(Ondes Martenot)를 ‘온데스 마르테노트’라고 번역한 것(p.173)과 같은 실수가 약간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재판에서는 수정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다시 말해, 재판을 찍게 되길 바란다). 끝으로, 이 사이트를 이용하는 우리 모두의 마음에 와 닿을 수 있을 구절 하나를 인용하면서 맺는 게 좋겠다.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는 사람들에 대한 어떤 저널리스트의 묘사다. “이제는 너무나 익숙한 광경이기 때문에 그다지 이상하게 보이지도 이상하게 들리지도 않는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야말로 걸어다니는 시체의 소리이며 모습이다. 머리는 약간 기울어져 있고 입은 벌어져 있다. 두개골 쪽에서는 금속으로 만든 벌이 내는 소리처럼 조그맣고 낮은 웅웅거림이 들린다. 눈은 뜨고 있지만 무언가를 보고 있지는 않다. 이들은 어딘가 다른 곳에 가 있다.”(p.37) 20061212 | 최민우 eidos4@freechal.com